아버지

아비없는 아들의 세상살이 그린 ‘깡철이’ 납치범에게 길러진 소년의 복수극 ‘화이’

아버지는 평온하고 안전해 보이지만 사실은 불순·불안한 공기가 섞여있어

원혼·동화·괴물·망령으로 그려진 그들 지금 아버지를 위한 나라는 어디에…

‘깡철이’에서 아버지는 부재한다.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에서 아들에겐 5명의 아비가 있는데, 그들은 모두 ‘괴물’이다. ‘소원’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아버지다운 아버지를 만나는 것 같은데, 영화는 그마저도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소원’의 아빠는 민낯으로 딸을 볼 수 없다. ‘코코몽’이라는 동화 혹은 판타지의 탈을 쓰고서야 아버지는 딸을 마주할 수 있다. 도대체 한국영화에서 아버지와 자식이 만나는 일은 왜 이리도 힘겨운 걸까? ‘아빠, 어디 가?’라는 예능프로의 유쾌하고 장난기 어린 질문이 한국영화 스크린에선 ‘아버지, 당신은 어디로 가셨나이까?’라는 비극적 체험과 상상으로 번역된다. 아버지, 아마도 2013년의 대중문화에서 가장 ‘문제적인 존재’가 아닐까.

‘깡철이’에서 치매로 정신줄을 놓은 어머니(김해숙 분)는 아들(유아인 분)을 젊은 시절의 남편으로 착각한다. 아들이 아버지의 망령을 대신하는 셈이다. 영화 속 현실에선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의 환각 속에서만 존재한다. 영화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해서 죽었는지 자세히 일러주지 않는다. 영화에선 그냥 원래부터 없던 사람이다. 아들은 어머니의 환영 속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할 뿐 아니라, 돈을 벌고 생계를 책임지며 힘겨운 모자살이의 가장 노릇을 한다. ‘깡철이’는 수컷들이 영역 다툼을 벌이는 정글 같은 세상에서 벌이는, 아비 없는 아들의 사투를 담았다.

‘소원’에서 아버지(설경구 분)는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 성폭행범으로부터 끔찍하게 유린당한 어린 딸은 사고 후 아버지를 피한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딸이 좋아하던 만화 캐릭터 ‘코코몽’의 탈을 쓴다. 이준익 감독의 말대로 그 순간부터 영화는 ‘동화’이자 ‘판타지’가 된다. 동화와 판타지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 우리가 민낯의 아버지를 두려움과 부끄러움 없이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영화는 말하는 것이다. ‘화이’의 아비들은 인두겁을 쓴 ‘괴물’이고, 인류의 DNA에 각인된 ‘순수악’이다. ‘나쁜 피’이며 ‘부정한 아버지’다. 피도 눈물도 없는 5명의 범죄자가 한 소년(여진구 분)을 납치해 살상의 기술을 가르치고, 악마의 혼을 심으며 ‘괴물’로 키우려 한다. ‘아버지들의 아버지’인 우두머리 석태(김윤석 분)를 움직이는 것은 자기 복제의 원초적인 본능이다. 아들을 자기보다 더한 괴물로 만들고자 한다. 아들은 자유 의지와 괴물의 본능 사이에서 아버지들의 시험에 든다.

돌이켜보면 올해의 한국영화는 ‘깡철이’와 ‘소원’과 ‘화이’처럼 어떤 식으로든 아버지들에 대해 발언해왔다. 벽두부터 그랬다. ‘7번방의 선물’은 자식을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은 바보 아빠의 이야기였다. 공교롭게 비슷한 시기 흥행한 외화 ‘레미제라블’ 역시 억울한 아버지, 자식을 지키기 위해 희생한 아버지가 주인공이었다. ‘억울하고 원통하게 희생한 바보 아버지’의 망령은 ‘더 테러 라이브’에 드리워진 음울한 그림자였다.

장르도 소재도 스타일도 다르지만, 아버지에 대한 서사와 상징으로 치자면 ‘7번방의 선물’과 ‘더 테러 라이브’는 일종의 대구였다. ‘더 테러 라이브’에서 테러로라도 억울함을 풀 수밖에 없는 존재는 평생 일을 해왔지만 늘 빼앗기고 경멸당해오기만 했던 바보 같은 아버지였다. ‘근대화’로부터 소외된 ‘근대화의 주역’이었다. ‘7번방의 선물’이 억울한 바보아빠의 희생담이었다면, ‘더 테러 라이브’는 바보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위한 자식의 복수극이었다.

‘숨바꼭질’이 집에 관한 이야기라면, 아버지의 집에 대한 이야기였다. 평온하고 안전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버지의 집’에는 불순하고 부정하며 불온하고 불안한 공기가 섞여있다. 그것이 ‘아버지의 집’을 태운 발화 물질이었다. ‘숨바꼭질’은 ‘아버지의 집’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고 은밀하게 일러준다. 아버지의 불온하고 불순한 욕망으로 세워진 집은 ‘뫼비우스’에선 훨씬 더 파국적인 비극의 무대가 된다. 아버지의 불륜이 아들에겐 거세의 위협으로 나타난다.

한국영화는 아버지들의 시간을 상징으로서 기록한다. 그것은 원혼의 시간이거나 괴물의 시간이거나 짐승의 시간이거나 동화의 시간이거나 부재하는 망령의 시간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를 위한 나라는 없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