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공인 감정평가사 시세조작
현행법상 손해배상책임 명시돼
평가조작 감지·예방체계는 미비
감독·징계 등 회계사 대비 느슨
전세 사기 사건이 ‘일파만파’입니다. 작정하고 사기를 친 세력들 앞에서 임차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임차인들의 잘못이라고 보기도 어렵죠. 사기를 적발해 낼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최소한의 안정장치도 작동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당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을 돕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법을 어길 수는 없겠죠. 정부가 내놓은 대책도 겨우 경매 진행을 늦춰 임차인이 강제로 집을 비워줘야하는 시기를 늦춘 게 전부입니다. 법적 근거도 없죠. 돈을 빌려 준 금융회사가 배임논란을 무릅쓰고 자기손실을 감수해야 가능합니다. 현행법 테두리에서 가능한 실질적 구제 수단을 검토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이번 사건의 구조와 근원을 따질 필요가 있습니다.
전세 사기의 출발은 부풀려진 주택가격입니다. 상식적으로 전세 보증금은 매매가를 넘지 않는 게 보통이죠. 전세보증금의 대가인 질권은 해당 주택에 한정됩니다. 주택가격이 전세가격을 밑돌아야 보증금이 제대로 반환되지 않을 때 임차인(또는 전세보증금 대출시행 기관)은 해당 주택을 경매 또는 공매에 넘겨 보증금을 회수할 수 있죠. 집주인은 해당주택의 가치 내에서만 보증금 상환의무를 갖습니다. 즉 보증금을 갚는 대신 담보로 잡힌 집을 넘기면 상환의무가 사라지는 것이죠.
전세 사기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구조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건축주는 집값 보다 높게 전월세 보증금을 책정합니다. 예를 들어 실제 가치가 2억원인 주택의 가치를 3억원으로 부풀리죠. 전세 보증금은 2억5000만원이 됩니다. 집값 2억5000만원은 건축주가 갖고 나머지 5000만원은 분양 대행사, 부동산 중개업자, 집주인 행세를 할 ‘바지 사장’(일명 빌라왕)이 나눠 갖습니다. 애초 돈이 들지 않는 사기 수법이라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죠.
아파트처럼 시세가 잘 투명한 주택은 비교적 집값의 70~80%선에서 전세 계약이 이뤄집니다. 아파트가 아닌 빌라는 시세파악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감정평가가격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감정평가는 감정평가사(법인)이 합니다. 전세 계약의 전제가 주택가격의 평가인데 정부가 자격을 인정하는 감정평가사가 사기 세력들과 짜고 임차인을 속인 정황이 상당수 드러났습니다. 실제 보다 부풀려진 주택가치 평가로 전세 대출이 집의 실제가치 보다 과다하게 이뤄진 것이죠. 사기를 친 세력은 더 많은 돈을 챙겼지만 대출을 받은 임차인은 살고 있는 집의 가치를 초과하는 빚을 지게 됐죠.
부동산 가격공시에 관한 법률은 적정가격 공시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적정가격’은 통상적인 시장에서 정상적인 거래가 이뤄지는 경우 성립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인정되는 가격입니다.
정부(국토교통부)는 매년 단위면적당 적정가격인 표준공시지가를 조사·평가하고 공시합니다. 표준공시지가는 감정평가 법인등이 개별적으로 토지를 감정평가할 때 기준이 됩니다. 지방자치단체는 재산세 등의 부과를 위해 개별공시지가를 결정합니다. 표준공시지가를 정할 때는 감정평가를 ‘의뢰할 수’ 있지만, 개별공시지가를 산정할 때는 타당성에 대해 감정평가법인등의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국가(국토교통부)가 공인하는 감정평가사(법인)의 역할이 아주 중요합니다. 감정평가가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게 되면 경제시스템에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이번 전세 사기 처럼요. 건설업자와 명의 상 집주인이 감정평가가까지 부풀릴 때 도대체 국가시스템은 무엇을 했을까요?
감정평가 및 감정평가사에 관한 법률을 살펴보면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공인회계사법은 공인회계사회에 회원의 ‘지도와 감독, 징계권(요구권 포함)’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공인회계사회는 금융위원회가 감독합니다. 감정평가법에 따라 설립된 감정평가협회는 ‘관리와 지도’만 가능합니다. 중앙정부가 직접 감독·징계의 책임을 진다는 뜻이죠.
법을 보면 국토부장관은 감정평가서가 발급된 후 해당 감정평가가 이 법 또는 다른 법률에서 정하는 절차와 방법 등에 따라 타당하게 이뤄졌는지를 직권으로 또는 관계 기관 등의 요청에 따라 조사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국토부는 감정평가 정보체계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스템이 문제를 얼마나 잘 감지하느냐죠.
감정평가는 과세의 기준이 됩니다. 평가액이 적을수록 세금도 줄어들죠. 세수 누수를 막기 위해 정부의 감시 체계도 ‘과소평가’를 막는 데 집중되었을 수 있습니다. 전세 사기는 반대로 ‘과대평가’로 경제적 이익을 노리는 구조입니다. 아이러니하게 과대평가가 이뤄지면 정부(지자체 포함)는 세금을 더 걷을 수 있죠. 타당성이 의심되는 감정평가를 정부나 관계 기관이 사전에 감지할 체계가 갖춰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주택 임대차(전월세) 계약 때 임대계약 당사자, 보증금, 임대료, 임대기간, 계약금 및 중도금과 잔금 납부일 등의 계약 사항을 30일 내에 시·군·구청에 신고하도록 한 전월세신고제는 2021년 6월에야 시행됩니다. 그 이전에 이뤄진 임대차 계약에 대해서는 정부가 사전이 이상을 감지할 수 있는 체계가 미비했던 셈이죠.
전세 사기의 출발이 된 감정평가 상의 문제가 명백하다면 감독 책임을 진 국토부의 잘못이기도 하죠. 헌법 29조는 공무원의 직무상 불법행위로 손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 또는 공공단체에 정당한 배상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민법에서 불법이란 고의나 과실로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위법행위입니다. 국가의 위법행위로 재산상의 피해를 배상받을 수 있는 관련 법률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죠. 감정평가법도 잘못된 감정평가를 적발해 낼 의무를 정부에 명시적으로 부여하지 않아 국토부의 잘못을 위법이라고 하기도 어려워 보이네요.
다만 현행 감정평가법 제28조에는 손해배상 책임이 명시돼 있습니다. 감정평가법인등이 감정평가를 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감정평가 당시의 적정가격과 현저한 차이가 있게 감정평가를 하거나, 감정평가 서류에 거짓을 기록함으로써 감정평가 의뢰인이나 선의의 제3자에게 손해를 발생하게 하였을 때에는 감정평가법인등은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습니다.
공인중개사도 잘못된 중개행위로 발생한 손해를 배상할 책임은 있지만 이번 전세 사기 사건에는 적용하기 애매합니다. 공인중개사의 설명의무 가운데 시세에 대한 부분은 없기 때문이죠. 국가공인 감정평가사의 평가를 바탕으로 했다면 공인중개사의 책임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이번 전세 사기 사건에 대해 감정평가사의 손해배상 능력도 상당해 보입니다. 2021년 7월 법 개정 전에 발생한 잘못된 감정평가에 대해서는 징계를 받더라도 자격 취소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가장 강력한 징계가 2년 이하의 업무정지나 등록취소(3년 이후 재등록 가능)입니다. 징계를 받더라도 일정 기간 후 감정평가사로서 경제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피해주택을 공공이 매입하거나 경매시 임차인에 우선매수권을 부여하는 방안도 거론됩니다. 모두 입법이 필요합니다. 사기 사건의 피해를 보전하기 위해 정부가 예산을 투입하는 방안은 법적 논란이 클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기 사건과의 형평 논란도 빚어질 수 있죠. 우선매수권 부여는 선순위 채권자인 대출금융회사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신중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