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세대 K팝 팬덤의 강력한 기후행동
철옹성 엔터ㆍ1등 음원 플랫폼도 변화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밸런타인데이를 맞은 지난 14일 오후 홍대 앞 버스킹존. NCT드림이 다시 부른 1세대 그룹 H.O.T의 ‘캔디’에 맞춰 K팝 팬들이 커버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점심식사 이후 나른해진 오후에 이동하던 사람들이 멈춰 서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본론에 들어간다. 20대의 앳된 K팝 팬이 버스킹 존으로 나와 마이크를 들었다. Z세대 K팝 팬덤이 모인 기후행동 단체인 ‘케이팝포플래닛’의 이다연 활동가다.
“매일 생각했어 멜론아. 난 너를 어디서 재회해야 할까. 여기까지 오는데 우연은 한 줄도 없었어. 나는 국내 스트리밍 플랫폼 중 한국 시장 점유율 1위라는 어마어마한 너에게 꽂혔고, 너가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만을 쓰길 바라며 여기까지 왔어.”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송혜교가 연진에게 보내는 내레이션을 패러디한 편지. 수신인은 멜론. 이들 사이에 나름의 서사가 쌓였다. 멜론과의 ‘운명적 만남’은 지난해 6월이었다. 국내 스트리밍 업체에 재생에너지 전환을 요구하며 벌인 ‘멜론은 탄소맛’ 캠페인이 시작이었다. 음악을 재생할 때마다 스트리밍 서비스 데이터 센터에선 사용자의 기기까지 음악 데이터를 전송, 이 과정에서 화석연료가 사용돼 탄소 배출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케이팝포플래닛은 이에 멜론에게 꾸준히 ‘메시지’를 보냈다. 친환경 에너지를 써달라는 리뷰를 남기고, 지난해 9월엔 전 세계 K팝 팬덤 1만여 명의 서명을 받았다. 같은 해 10월엔 국회에서 포럼을 열었다. “최악의 기후 대응을 하는 스트리밍 서비스 1위”로 멜론이 뽑혔다는 설문도 공개했다. 지난 연말 케이팝포플래닛은 국내외 K팝 팬 약 5만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2 최악의 스트리밍’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당시 멜론이 1위(한국 47%, 해외 57.1%)를 차지했고, 벅스(한국 38.3%, 해외 17.9%), 지니뮤직(한국 8.5%, 해외11.3%), 바이브(한국 6.2%, 해외 13.7%)가 그 뒤를 이었다.
이다연 케이팝포플래닛 활동가는 “꾸준히 활동을 해왔는데 답변이 없어 연초 밸런타인데이에 고백하는 느낌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NCT드림의 ‘캔디’ 커버댄스는 꽤 야심차게 준비한 이벤트다.
■ “탄소 배출 줄여줄래? 우리가 도와줄게”…“친환경 데이터로 이전 중…우리 대화할까?”
케이팝포플래닛이 이러한 활동을 하는 것은 음악 스트리밍 업체가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친환경 데이터 센터’를 구축하고, 여기에서 재생 에너지를 사용하면 된다. 이들의 요구 역시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 사용을 약속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세계 최대 음악 플랫폼인 스포티파이를 필두로 애플뮤직, 유튜브에선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는 친환경 데이터 센터를 구축하고 있다.
국내의 여건이 다르다. 업계 관계자들의 입장은 “기업이 재생에너지를 쓰고 싶어도 쓸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우리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구글, 애플 등이 위치한 미국과 유럽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이 20~60%대에 이르지만, 한국은 5.8%에 그친다.
케이팝포플래닛 역시 이러한 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이들은 Z세대 K팝 팬덤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하고자 하는 일을 행동하는 것이다. 이번 캠페인 직전엔 멜론 측에도 참석을 요청했다. 멜론도 응답했다. 현장에 직접 참석하진 않았지만, 국내외 여건 차이와 재생에너지 전환을 위한 작업 과정을 공유했다.
멜론 관계자는 “자체 데이터센터를 가지고 있지 않아, 임차 데이터센터를 사용 중인데 작년 12월부터 재생에너지를 사용하는 친환경 데이터센터로의 이전을 작년 12월부터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워낙 오랜 시간 서비스가 누적된 탓에 이전 작업은 단기간 내엔 불가능하다. 멜론 측은 “수 년에 걸친 계획을 통해 순차적으로 진행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이다연 활동가는 “가장 큰 요구가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 사용이었는데, 이러한 부분에 있어 입장을 듣게 된 것 같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며 “기업들이 재생에너지를 쓰고 싶어도 못 쓰는 것이라면 케이팝포플래닛이 기업과 협력해 정부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향으로 캠페인을 진행할 수 있다. 우리는 늘 열려있다”고 강조했다. 멜론 역시 열려있다. 멜론 관계자는 “곧 케이팝플래닛과 직접 만나 이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대화를 나눌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 철옹성 같은 엔터사의 변화…“기업이 할 수 있는 역할 해주길”
올해로 3년차가 된 케이팝포플래닛의 기후행동으로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크고 작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케이팝포플래닛은 앞서 ‘죽은 지구에 K팝은 없다’는 캠페인을 시작으로 대형 기획사와 K팝 아티스트, 팬덤이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것에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요구도 구체적이다. K팝 산업을 이끌고 있는 주요 수익원이자, 팬덤의 필수 소장품인 음반 판매 방식에 대한 개선 요구다. 현재 모든 가요기획사는 화보집 못지 않는 사진, 신용카드 크기의 포토카드, 포스터와 엽서, 팬사인회 응모권을 함께 담아 음반을 제작한다. 특히 팬사인회 응모권은 많으면 많을수록 당첨 확률이 높아지기에, 다수의 팬들이 CD를 사모으는 이유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응모권으로 인해 CD를 50장을 사면 나머지 49장은 처치곤란 쓰레기가 된다. 케이팝포플래닛에선 이에 ‘그린 앨범 옵션’을 요구했다. 이다연 활동가는 “음반 구매시 우리는 50장의 앨범 가격을 낼 테니, 대신 실물 앨범은 두 장 정도만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옵션을 요청하고 있다”며 “배달업체에서 일회용 식기를 받지 않겠다는 옵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기후 감수성’이 높은 Z세대이자, 충성도 높은 K팝 팬덤이라는 이들의 특성이 업계에서도 외면할 수 없는 외침이 되고 있다.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가 소속된 하이브, YG엔터테인먼트는 물론 다수 기획사에서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은 친환경 음반이 제작되고 있다. 하이브는 QR코드로 인식하는 디지털 플랫폼 앨범을 처음으로 선보이기도 했다. 다만 아직은 피지컬 앨범의 보조수단 정도다. SM에선 서스테이너빌리티 포럼을 진행하고 ‘더 큐어(The Cure)’라는 곡을 발표하며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해 목소리를 냈다. ‘나무 심기’ 캠페인도 추진 중이다. 멜론에서도 응원하는 아티스트의 이름으로 숲을 조성하는 ‘숲;트리밍’ 서비스를 진행 중이다. 업계에선 “K팝 팬 문화를 함께 하며 기후위기에 대응하고, 지속가능한 음악 생태계를 조성”하겠다는 입장이다.
3년에 걸친 기후행동이 끌어내고 있는 대형 기획사들의 변화가 놀랍다. 이다연 캠페이너는 “처음 활동을 시작할 때엔 철옹성 같은 엔터사들에게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까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의 변화가 신기하기도 하다”며 “칭찬할 부분은 칭찬하되 아쉬운 부분은 개선하며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가고 싶다. 숲 조성이나 나무 심기는 기존 K팝 팬덤이 해온 활동인 만큼, 음반 제작의 변화나 탄소 중립 콘서트 등 기업은 기업만이 할 수 있는 시도를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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