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헌법 1조 1항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문장이다. 이처럼 헌법은 국가의 정체성이자 국가운영과 유지의 근본이 되는 기본적 가치질서를 규정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헌법에서 ‘과학기술’은 어떻게 규정돼 있을까? 과학기술이 우리 헌법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62년 제5차 개정헌법이다. 동 헌법 제118조 1항에는 ‘국민경제의 발전과 이를 위한 과학진흥에 관련되는 중요한 정책수립에 관하여 국무회의 심의에 앞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경제·과학심의회의를 둔다’를 통해 서다. 이후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쳐 1987년 개정 헌법부터 제9장 127조 1항에는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로 국민경제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 과학의 역할을 규정했다.
대한민국에서 과학기술은 지난 60년 동안 헌법에서 부여받은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한강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도록 산업계에 필요한 과학기술을 충실히 공급했고, 1966년 설립된 최초의 정부 출연연구기관인 KIST만 해도 설립 이후 지난 50여년간 600조원 이상의 경제·사회적 파급효과를 창출한 것으로 공식 평가되고 있다. 그사이 우리 경제는 세계 최고속도로 성장해 전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를 갖추는 선진국이 됐고, 과학기술의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과학기술 강국으로 성장했다.
이제 우리는 경제성장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더 성숙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세계 일류국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과학기술도 국민경제 영역은 물론이고 국민생활, 사회안전, 생명윤리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그 역할을 확장해왔다. 따라서 과학기술의 역할을 국민경제에 국한하는 것은 무의미한 상황이 됐다.
4차 산업혁명과 디지털 대전환 시기에 감염병에 대응하기 위한 연구·개발(R&D)은 국민경제만을 위한 연구일까?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연구는 경제발전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약하니 뒤로 미뤄둬야 하는 연구일까? 기초연구는 당장에 경제적 효과가 없으니 산업기술보다 중요도를 낮게 봐야 할까? 이런 질문들에 대해 ‘꼭 그렇지는 않다’라는 답을 내렸다면 현재의 헌법 속 과학기술의 가치를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다른 나라들은 어떨까? 스위스 헌법에서는 ‘연방은 과학연구를 장려한다’고 명시돼 있다. ‘무엇을 위하여’라는 목적 없이, 과학연구 그 자체가 목적인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과학기술이 헌법에 등장하지 않는다. 의외일 수도 있겠지만 두 나라 모두 과학기술 강국인 것으로 보아 이는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과학기술의 목적을 한정 짓지 않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은 헌법 속에 과학기술이 등장하지 않음에도 2차 세계대전 이후 국내총생산(GDP) 성장분의 절반 이상이 과학기술 발전의 결과로 평가하고 있다. 즉 과학기술을 굳이 경제성장의 도구로 규정 짓지 않더라도 이미 직·간접적으로 국가 경제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 헌법 속에서 경제 발전의 도구로 역할이 한정되어 있는 ‘과학기술’을 해방시켜서 과학기술이 사회문화를 혁신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사회를 견인하고 보다 큰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하지 않을까?
김복철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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