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그린 서양화가 신현국
화폭 가득 담긴 계룡산의 생명력
산은 스승이자 사유의 대상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나의 작업실은 계룡산의 갑사와 멀지 않은 산골이다. 창을 열면 산을 볼 수 있고, 나무도 새도 함께인 것처럼 산을 그리는 작업에 몰두한다. 언제나 봄을 기다리는 마음이 되어… 봄처럼 영원히 청춘으로 살아가기를 소원한다.”(신현국, ‘봄의 소리’ 중)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신현국(83) 화백은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 작업장으로 향한다. 저녁식사를 하는 다섯 시까지 꼬박 그림을 그리고, 밤 사이엔 오늘 그린 그림을 머릿속으로 연구하고 고민한다. “자기 전까지 그림에 대해 고민하다 보면 아침에 일어나 즉시 휘두르고 싶어진다”고 한다.
신 화백의 인생과 작품에서 산은 중요한 키워드다. 40년 전 계룡산에 터를 잡은 이후 그는 삶의 절반 이상을 계룡산을 그리는데 몰두하고 있다.
홍대 회화과를 다니던 대학 시절엔 스승인 김환기, 남관의 영향을 깊게 받으며 비구상에 젖었다. 이후 시간은 자연스럽게 그를 구상화의 세계로, 산으로 이끌었다. “젊을 때엔 구상의 매력을 잘 몰랐어요. 그런데 산에서 만난 구상의 세계엔 작가의 철학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 철학이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교감하더라고요.”
말년 20년 동안 고향의 산을 그렸던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 세잔의 그림을 사랑해 “‘생 빅투아르’를 직접 가곤 했던” 그가 찾은 ‘인생의 산’은 계룡산이다.
“계룡산을 처음 스케치한 건 50년 전이었어요. 여느 산과는 다른 헤어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우람함이 있어요. 설악산은 압도적이라 채워가기 어렵고, 지리산은 부드럽고 여성적인 산이라 나와 맞지 않았어요. 계룡산은 남성적이면서도 여성적 세계가 함께 있어 그림 그리는 사람에게 좋은 산이에요.“
산은 아이에겐 놀이터고, 어른에겐 안식처다. 신 화백에게 산은 “살아있는 스승”이고, 자연은 “사유의 대상”이다. 그는 산에게서 인생의 진리를, 그림 그리는 사람의 자세와 정진 방법을 배웠다. “여름이면 녹음이 짙어지고, 가을이면 단풍을 만들고, 겨울이면 앙상한 가지로 계절을 이겨내죠. 시간을 견뎌 봄을 맞으면 다시 싹을 틔워내고요. 우리 인생과 닮았어요.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봄이 오지 않는다는 걸 산을 통해 알게 됐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이 늘 쉬웠던 것은 아니다. 청년 시절엔 유화를 그릴 때 사용하는 화학 염료 중독으로 3년을 앓기도 했다. 화폭 앞에선 무수히 많은 고민이 거듭되고 수백 번의 붓 터치로 시간과 삶을 담아낸다. “항시 좋은 그림이 나올 수는 없어요. 자연이 주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겨내면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세계가 나오더라고요.”
고난을 딛고 선 삶은 생명력이 가득 찼다. 산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은 고스란히 화폭으로 옮겨진다. 그는 “젊은 시절의 그림은 회색빛의 어두운 색조가 많았는데, 계룡산에 와서 그린 그림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고 했다. “계룡산에서 그린 그림이 저를 가장 활발하게 했던 세계이기도 해요.” 산의 생동하는 아름다움은 창의적인 회화적 언어로 이어졌다. 눈에 보이는 형상을 담으면서도 그의 산은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를 허문다.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구상이라면 어머니의 마음을 그리는 것이 비구상이에요. 화가의 마음은 시인과 같아요. 마음속 절절함이 그림으로 묻어나야 하죠. 거기에서 출발해야 좋은 그림이 나와요.” 산을 바라보며 느낀 깊은 감정과 울림, 무게감이 화폭에 담겨 때론 담대하게, 때론 담백하게 표현된다. 비구상의 압축미를 보여주듯 두꺼운 붓질로 생생하게 가로지르고, 화가들이 기피하는 색인 보랏빛을 통해 색의 혁명을 완성했다. “산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자연의 겉모습과 색에만 취해선 안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열 살 무렵 그림을 배우기 시작해 일생을 그림과 함께 했다. 신 화백은 자신의 삶을 “언제고 그림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며 “지금도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몸의 한계를 모른다”고 했다.
“산은 제게 삶이에요. 산을 알게 될수록, 산에 깊이 들어갈수록 더 좋은 그림을 그리게 되고, 자연에서 발견한 진리 덕분에 그림을 놓지 않을 수 있었어요. 자연 속에 인간이 있고, 자연을 알게 될수록 신에 가까워져요. 그곳에서 그린 그림이 제겐 종교입니다.”
sh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