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유료 공연 복원

코로나19로 취소됐다 재개…120년 전과 ‘평행이론’

 

‘기원의식’ 승무, 바라춤으로 시작

소리 재담 아우른 악가무희극

“안무 구성, 실감형 콘텐츠, 재해석…

전통의 현대화로 선배 예인 계승”

‘감염병으로 공연을 올리지 못하는 국립정동극장 광대(예술단)들이 안타까워 100여년간 공연장을 지키며 살아온 조선시대 광대(귀신)들과 5명의 오방신(극장신)이 찾아와 함께 공연을 벌인다’ 이야기가 난데없이 현실이 됐다. 코로나19로 확진 판정을 받은 출연자가 생겨 공연 취소의 아픔을 맛보다 재개된 ‘소춘대유희 백년광대’ 안경모 연출가와 김윤수-이규운 감독. 세 사람은 이 공연을 국립정동극장의 역사와 정체성, 방향성을 담은 공연이라고 말했다. 박해묵 기자
‘감염병으로 공연을 올리지 못하는 국립정동극장 광대(예술단)들이 안타까워 100여년간 공연장을 지키며 살아온 조선시대 광대(귀신)들과 5명의 오방신(극장신)이 찾아와 함께 공연을 벌인다’ 이야기가 난데없이 현실이 됐다. 코로나19로 확진 판정을 받은 출연자가 생겨 공연 취소의 아픔을 맛보다 재개된 ‘소춘대유희 백년광대’ 안경모 연출가와 김윤수-이규운 감독. 세 사람은 이 공연을 국립정동극장의 역사와 정체성, 방향성을 담은 공연이라고 말했다. 박해묵 기자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조명 꺼진 무대에도, 관객이 떠난 객석에도, 텅 빈 극장을 지키는 ‘누군가’는 있었다. “‘광대의 넋’이 살아있다고 해요. 갑작스런 소동이 있거나, 크고 작은 사고가 생기면 농담처럼 그런 이야기를 하거든요. 극장에 귀신이 들어와 장난치는 것 같다고요. (웃음)”(안경모 연출) 100년 동안 살아온 귀신들, 한 시대를 살아온 ‘선배 예인’들과 그들이 만든 ‘역사의 순간’들이 무대에서 복원됐다. 최근 막을 내린 ‘소춘대유희 백년광대’를 통해서다.

작품의 출발은 120년 전이다. 1902년 우리나라의 첫 근대식 극장인 협률사. 대한제국 황제인 고종의 즉위 40년을 축하하기 위한 성대한 공연을 열기 위해 조선팔도의 예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곳에 모인 악(樂), 가(歌), 무(舞), 희(戱), 극(劇)에 통달한 당대 ‘스타 예인’들은 무려 170여명. 난데없이 ‘평행이론’이 등장한다. 그 무렵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해 공연은 무기한 연기됐다. 한참을 기다려 막을 올린 최초의 근대식 유료공연이 바로 ‘소춘대유희’였다. 협률사에서 원각사로 이름을 바꾼 근대식 극장을 이어받은 국립정동극장. 이 공연은 ‘정동’의 과거이자 현재였고, 미래였다.

‘소춘대유희 백년광대’가 공연을 마치기까지 모든 과정이 다사다난했다. 공연 4일차였던 지난달 27일, 시작 5분 전 갑작스러운 안내방송이 나왔다. “출연자 중 한 명이 코로나19 의심 증상을 보여 공연을 취소합니다.” 역사는 반복됐고, 관객과 예술인들은 무기력했다. ‘감염병으로 공연을 올리지 못하는 국립정동극장 광대(예술단)들이 안타까워 100여년간 공연장을 지키며 살아온 조선시대 광대(귀신)들과 5명의 오방신(극장신)이 찾아와 함께 공연을 벌인다’ 이야기가 현실처럼 다가왔다.

최근 국립정동극장에서 만난 안경모 연출과 김윤수, 이규운 안무감독은 “관객들이 마음을 담아 박수를 치고 흥을 일으켜줬다. 그게 참 행복했다”고 돌아봤다.

‘소춘대유희 백년광대’ 연출 안경모, 안무가 김윤수-이규운. 박해묵 기자
‘소춘대유희 백년광대’ 연출 안경모, 안무가 김윤수-이규운. 박해묵 기자

■ ‘소춘대유희 백년광대’…“국립정동극장의 방향성 보여주는 예고편”

‘소춘대유희 백년광대’는 지난 5월 ‘국립극장’으로 명칭이 변경된 ‘국립정동극장’과 새로 창단한 정동극장 예술단의 역사와 정체성이 담긴 작품이다. 세 사람은 전통예술의 꽃을 피우며 동시대 트렌드를 담은 무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국립정동극장의 방향성을 작품에 녹였다.

안무를 맡은 이규운 감독(국립정동극장 예술단 지도위원)은 “정동극장 예술단을 다른 극장과 차별화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오래 고민한 끝에 연희를 동시대 예술로 창작하는 작품을 해보자고 판단해 ‘소춘대유희 백년광대’가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관습적으로 전통연희라고 할 때 사람들마다 다른 색깔로 바라보게 되는 것 같아요. 기존의 소리, 무용과 변별되는 탈놀이를 중심으로 한 전통연희로 국한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정동극장 예술단은 기존의 무용, 타악에 대한 질감을 쌓아올려 그 위에서 전통연희로 국한하는 것까지 포괄해 악가무희극을 통합하는 영역으로 나아가 다른 단체와의 변별점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안경모)

"이 작품은 종합예술을 하는 단체로서의 국립정동극장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일 거예요. 예술이 종합예술이어야 한다면, 그것의 가장 우수한 장르는 영화일 거예요. 그렇다면 영화에서 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무대가 구현할 수 있을까. '소춘대유희'엔 그 해답이 있어요. 딥페이크까지 동원한 실감형 콘텐츠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구현했고, 그러면서도 이와는 정반대로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구현할 수 없는 것을 보여줬죠. " (김윤수)

‘소춘대유희 백년광대’는 일종의 ‘버라이어티 쇼’다. ‘기원의식’을 담은 한국무용 승무로 시작해 재담, 소리, 줄타기, 불교의식의 바라춤 등 다양한 전통예술이 무대에서 병렬식으로 나열된다. 안 연출가는 “지금의 현대 관객에게 단순한 버라이어티쇼는 매혹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채로운 요소를 극적인 전개 과정으로 묶어 하나의 이야기 구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관객들의 몰입도가 높아지는 부분도 이 지점이다. 김윤수 안무감독은 “굉장히 영리한 대본”이라며 “관객들이 좋아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성을 잃지 않는 내러티브가 잘 살아났다. 서사는 잘 흘러갔고, 그 안에는 정동극장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제안하는 것까지 포함했다”고 말했다

다양한 장르의 전통예술을 아우른 공연인 만큼 볼거리가 많다. 제작진에겐 시간 안배가 특히나 어려운 부분이었다. 1시간 40분의 러닝타임 동안 30~60분 공연이 적합한 각각의 춤, 소리, 놀이 등의 장르를 3~4분으로 압축해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각 장르의 역사를 고민”했고, ‘장면의 질’을 놓치지 않았다. 3~4분의 축약본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수개월을 연습에 매진하니, 향후 레퍼토리도 확보하는 계기가 됐다.

“‘소춘대유희 백년광대’는 정동극장이 나아갈 방향을 보여주는 1시간 40분짜리 예고편이에요. 시간이 지나 이 작품은 또 다른 원형이 될 거라고 봐요. 이 안에서 부분적으로 해체해 승무, 바라춤, 소리 등 하나의 작품으로 증폭시켜 새로운 공연들이 나올 수도 있죠.” (김윤수)

‘소춘대유희 백년광대’ 연출 안경모, 안무가 김윤수-이규운.
‘소춘대유희 백년광대’ 연출 안경모, 안무가 김윤수-이규운.

■ 원형·경계·차원의 도전…“전통의 현대화 이상의 현재화”

작품은 많은 부분에서 도전과 실험을 피하지 않았다. 타악 연주자, 무용수들이 주종목 외에도 연기까지 겸하는 등 경계를 넘었다. 전통의 원형을 뛰어넘는 파격도 연출됐다. 상모 놀이 때 쓰는 초리를 머리가 아닌 손으로 돌리는 시도였다. 이 감독은 “초리의 동양철학과 원형의 미를 잘 나타낼 수 있도록 머리로 돌리는 것처럼 손으로 구현했다”고 말했다. 극장 공연에서 이런 시도를 한 것은 ‘소춘대유희 백년광대’가 처음이다. 안 연출가는 “현실세계가 아니라 귀신 광대와 노는 무대인 만큼 모든 파격이 가능했다”며 “무엇이든 허용할 수 있는 틀에서 시작했기에 훨씬 자유로웠다. 그 안에서 조금 더 새롭게 가보기를 시도했고, 정수를 뽑아내려 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걱정은 있었다. 이 감독은 “그동안 이어온 많은 선생님들의 원형을 함부로 확장한 것은 아닐까 우려도 됐다”고 말했다.

“‘소춘대유희 백년광대’ 안에 많은 고민이 있었어요. 3~4개월 짜리 짧은 여정(연습기간)에 대한 고민, 다양한 전통예술 요소를 나열하며 1시간 40분이라는 분량을 맞추기 위한 시간에 대한 고민, 1초 단위로 드러나는 원형에 대한 고민, 그러면서도 미래를 제시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였다고 생각해요.” (김윤수)

고민이 깊었던 만큼 매장면 엄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본질’이었다. 안 연출가는 “기본기에 충실하고, 그 이상을 뛰어넘어 새로움을 추구하면 재주가 된다”고 강조했다.

“본질을 놓치는 순간 우리는 다 망한다, 뿌리는 단단히 딛고 꽃과 가지는 풍성하고 다채롭게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선배 예인들에 대한 예의고, 당대 관객과 만나는 과정에서 항상 지켜야 하는 것이니까요.” (안경모)

100여년 전 빛났던 예인들의 예술은 현재의 기술을 통해 눈부시게 빛났다. 작품은 그야말로 가장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이 만났다. 명창 이동백과 당대 예인들이 홀로그램, 딥페이크 등의 첨단 기술로 복원됐고, 흥미로운 역사의 순간들이 되살아났다. 장르마다 킬킬대며 웃고, 감탄하다 감동한 순간들은 결국 이 장면을 위해 달려왔다. 안 연출가는 “광대의 넋을 기술로 재생시키는 것, 그것 역시 현재화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00년 동안 살아온 귀신들을 복원해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를 만들고, 그것을 우리가 호흡하고 살아가는 예술로 만들기 위해선 기술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구한말부터 해방 직전까지 예인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여주기 위해 앞 부분에 판을 깔아온 거죠. 그 과정은 어찌 보면 현재의 정동극장 예술단이 붕 떠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선배들이 켜켜이 퇴적층을 쌓아온 위에 딛고있다는 걸 보여준 것이었어요.” (안경모)

‘소춘대유희 백년광대’는 그 어느 작품보다 과감하게 시도했고, 지금에 맞춰 전통을 재해석했다. 연출, 구성, 안무 요소 곳곳에 ‘전통의 현대화’라고 이야기할 만한 다양한 장치가 담겼다. 될 것"이라며 "한국적 코드를 배제하고도 충분히 한국적인 것의 정수를 담고 현대무용을 능가하는 춤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껏"이라고 했다. 이 감독은 "정중동의 미학을 담은 한국춤의 특성에 동시대가 가진 움직임이 어우러진 현대화가 나온 작품"이라고 했다.

“이젠 전통의 현대화보다는 전통의 현재화라고 하고 싶어요. 전통예술은 ‘차원을 툭 이동시켜주는 세계’와 같아요. 명무가 손 한 자락 툭 치면 세상이 출렁인다 하는 것처럼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요. 신명과 흥이 내 안의 무의식 세계에 있던 것을 꺼내 뒤바꿔놓고 세상을 이동시키는 힘이죠. 전통의 현재화라는 것은 전통의 이러한 힘을 당대 관객과 나누는 과정이에요. 그 과정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흥미롭게 꺼내고, 관성적으로 익숙했던 것을 새롭게 보게 만들면 전통을 발견하는 거죠.”(안경모)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