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대포통장 〈3부 - 꼬리 자르기〉 끝에필로그 - 어느 공기업 사원의 말하지 못한 비밀
20대 이정우(가명) 씨는 지난 여름 누구나 알 만한 공기업에 합격했다. 하지만 마냥 기뻐하지 못했다. 오히려 우울감에 젖어 있다. “부럽다. 그런 안정적인 공기업 들어가서.” 주변의 축하에 애써 웃어 보이지만 뒷맛은 씁쓸하다.
“곧 잘리게 될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 같아요. 전과자가 되게 생겼으니까요.”
그에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다. 친구, 직장 동료는 물론 가족들마저 모르는 사실이다. “어렸을 때부터 떳떳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어요. 커서 공직생활을 할 거라고 기대했죠. 하지만 한순간 범죄자가 됐어요. 이게 가능할까 싶었는데, 가능하더라고요. 속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씨는 직업군인으로 입대해 4년을 복무했다. 사회에 나가 공적 영역에서 근무하고 싶단 포부를 품었다. 지난해 말 군복을 벗고 9급 공무원 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틈틈이 공기업에도 원서를 넣었다. 구직은 만만치 않았다. 합격도 기약은 없었다. 모아뒀던 생활비가 빠르게 줄어들자 아르바이트(알바)라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올해 봄 알바천국 채용공고를 훑다가 수납직원을 구한다는 ‘OO대부’의 곳의 채용공고를 봤다. 담당자는 “고객들에게 대출을 알선해주는 회사다. 당신의 업무는 고객들을 만나 수수료를 받아오는 일”이라고 소개했다. 대부업체라 경계심은 들었지만 검색해보니 실제로 그런 이름으로 등록된 대부업체가 있었다.
일을 하기로 했다. 근무 첫날, 영등포역으로 나와 대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거기서 6시간을 기다린 끝에 경기도의 한 도시로 이동하란 업무가 떨어졌다. 거기서 고객 한 명을 만나 대금(800만원)을 받았고 회사에서 알려준 대로 은행 ATM으로 무통장 입금했다. 그리고 일을 더 하지 않기로 했다. 일당으로 20만원을 받았다.
“첫날 퇴근하려는데 추가 건을 진행할 수 있겠냐더라고요. 저녁에 약속이 있다고 거절했습니다. 내적갈등을 했어요. 큰돈이 오간다는 점이 부담스러웠고 실제 일하는 시간보다 대기 시간이 길어서 차라리 물류센터에서 일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당일치기 알바는 이후 기억에서 잊혔다. 하지만 한 달 뒤 족쇄가 돼 돌아왔다. 경기도의 한 경찰서에서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으로 가담했다”며 출석하라고 했다.
“조사받으면서 수사관님이 죄명을 ‘사기죄’로 적는 걸 보는데 허망했어요. 어린 나이지만 직업군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는데 사기라니….”
이씨는 헤럴드경제가 ‘인간 대포통장’ 기획 보도를 준비하며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보이스피싱 현금 수거책 피의자 가운데 한 명이다. 가짜 취업공고에 속아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됐다. 심부름꾼으로 쓰이고, 꼬리 자르기를 당했다. 보이스피싱임을 알지 못했다고 항변해도 재판에 넘겨지면 10명 가운데 9명 이상이 징역형이나 집행유예를 선고받는다.
“연재기사에 나온 분들 보면 그저 안쓰러워요. 할 수 있는 게 없을 만큼 상황이 절망적이에요. 저는 하루 알바로 끝냈지만 길게 할 수도 있었어요. 어쩌면 그분들처럼 될 수도 있었겠죠.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몰라요.”
한 명의 피해자만 남긴 이씨는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 취재팀이 만난 피의자들은 우스갯소리로 “최대한 빨리 체포되는 것이 축복”이라고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액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서다. 피해자와 피해금이 많다면 형량은 더 높아진다. 형사처벌 전력이 전혀 없더라도 수사기관과 법원은 ‘강력처벌’을 내세운다.
피해자가 한 명이고 피해액이 비교적 적다. 이씨는 어떻게든 돈을 만들어 피해자와 합의할 계획이다. 재판부의 선처를 기대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엔 ‘언제라도 전과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웅크리고 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친구들은 취업, 연애 걱정을 늘어놓으며 속상해하지만 공감이 안 된다. 검찰은 이씨의 사건을 ‘보완 수사’를 요구하며 경찰로 다시 내려보낸 상태다.
“공기업에 합격했는데 한동안 아무한테도 떳떳하게 말하지 못했어요. 동료들의 자신감과 씩씩함을 보면 부럽습니다. 집행유예라도 받게 되는 날엔 해고될 시한부처럼 느껴져요. ‘알고 한 것 아니냐’고 하지만 일당 10만~20만원 벌자고 꿈과 희망을 버리는 선택을 누가 하겠어요.”
[헤럴드경제 디지털스토리텔링 : 인간 대포통장]
졸지에 사기범죄의 ‘공범’이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를 현금다발을 받아 어딘가로 입금했습니다. 수사기관은 그들을 ‘현금수거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보이스피싱 총책과 범행을 공모했다는 죄를 묻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가짜 취업 공고에 속아 ‘그 일’에 엮였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은 취업준비기간을 보내던 청년, 코로나19로 일터에서 밀려난 구직자, 단지 세상경험 쌓으려 알바를 찾았던 대학생이 보이스피싱 조직의 거미줄에 걸려들었습니다.
피해자와 사회는 그들을 비난합니다. ‘어떻게 범죄인 걸 모를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하지만 보이스피싱 설계자들이 짜놓은 판은 지독하리만큼 교묘합니다. 피해자들을 감쪽같이 속이듯이 자기들의 수족 노릇을 할 사람도 철저히 기망합니다. 정작 보이스피싱 본체는 막대한 수익만 삼키고 법망을 피해 음지로 숨어들고 있습니다.
공범이 된 이들의 허물없음을 대변하려는 게 아닙니다. 평범한 이들이 어떤 환경에서는 한순간에 피해자-피의자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경고의 기록입니다. 동시에 보이스피싱 꼭두각시가 된 사람들을 비난하고 강하게 처벌하는 게 최선인지 화두를 던지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