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K 서울, 에르난 바스의 개인전
노인은 실패했지만, 소년 마놀린은 기어코 성공했다. 상어를 잡았다. 노인이 잡은 청새치를 먹어치운 상어에 대한 복수다. 비가 몰아치는 바다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빛은 성공한 이들의 자부심이나 후련함보다는 모호함으로 가득하다. 부모가 그렇게 반대했던 항해에 나섰고, 전리품도 획득했지만 ‘이것이 다 무슨 의미인가’라고 말하는 듯 하다. 소년이 어른이 되는 과정, 즉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바다에서 상어를 잡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모험일지도 모르겠다.
이 회화는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가 끝나고 난 뒤의 이야기다. 부모의 반대로 노인과 함께 떠나지 못했던 마놀린이 성장해 자신의 이름을 딴 배를 타고 항해에 나선다는 상상이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작가 에르난 바스(42)의 근작은 이처럼 이야기가 끝나고 난 이후를 담았다.
코오롱의 문화예술 나눔공간 스페이스K 서울은 ‘모험, 나의 선택’이라는 주제로 에르난 바스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미국 마이애미 출신 쿠바계 회화작가인 그는 세계적 컬렉터인 루벨 컬렉션에 소개되면서 스타 작가로 발돋움 했다. 전시에는 2007년부터 최근작까지 약 20여점을 선보여, 시기별 변천사를 만날 수 있다.
특히 근작들은 ‘물’과 관련이 깊다. ‘지독한 가뭄 후의 시작’은 미국의 60년대 모텔을 배경으로 검은 후드티를 입고 있는 주인공이 수영장에서 빗물을 받고 있다. 한적한 도로 인근 모텔은 공포 드라마나 종말을 다루는 TV 시리즈물에 주로 등장하는 장소인데, 여기에 물 부족을 암시한 상황은 파국적 재앙을 짐작케 한다. 전봇대들이 드리운 그림자 마저도 십자가 모양이다. 지극히 미국적 풍경이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디스토피아적으로 그려진다. 대형 벽지화인 ‘괴물과 뱃사람’도 젊은 어부, 선원, 탐험가, 잠수부가 주인공인 드로잉 들이다. 어릴적 읽었던 문고판 소설의 삽화를 자신의 방식으로 소화한 것들이다.
모든 작품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또 다른 요소는 ‘소년’이다. 어른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이도 아닌, 경계에 선 이들은 하나같이 무감각하고 무료한 표정으로 그려진다.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서 그 어느 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이들이 갖는 특유의 무심함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아름답다. 수많은 문학작품이 찬양했던 바로 그 시기다. 미숙하고 불완전하며 실수투성이 임에도 이제 막 들어선 젊음의 원초적 에너지가 매력적이다. 작가는 “인물이 어떤 상태인지 아주 집요하게 표현하지 않는 ‘모호함’이 나에겐 중요하다”며 “관객들이 채워넣을 부분”이라고 설명한다.
때문에 회화에 드러난 상징들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네스호의 괴물, 성소수자들의 인권문제를 발화시킨 ‘줄리어스 바’의 ‘십 인(Sip-in)’사건 등 맥락을 알아야 더욱 풍성한 해석이 가능하다. 작가는 “관람을 마치고 집에 돌아간다면, 오늘 전시에서 접한 이상한 이야기들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자신의 모험으로 이어나갔으면 한다”고 당부한다. 이상한 나라, 낯선 혼란의 세계로 향하는 초대장인 셈이다. 전시는 5월 27일까지. 이한빛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