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과 악, 인간 본성에 대한 통념을 뒤집은 충격적 심리실험.’ 책을 홍보하는 문구처럼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충격적이었다. 1971년 스탠퍼드 대학의 필립 짐바르도 교수는 남자 대학생 24명을 선발해 교도관과 죄수 노릇을 맡기는 모의감옥을 실험했다. 일당 15달러에 2주간으로 기획된 이 실험은 시작부터 파행을 겪더니 6일 만에 종료됐다. 교도관들은 권위적으로 행동했고, 심지어 성적 학대까지 저질렀다. 죄수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한 끝에 반란까지 일으켰다. 실험결과가 워낙 충격적인 까닭에 2001년 독일과 2010년 미국에서 ‘익스페리먼트(실험)’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이 실험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썩은 상자가 썩은 사과를 만든다.’ 즉, 본디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상황과 제도가 사람을 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게 악마의 이름을 딴 ‘루시퍼 이펙트’다. 짐바르도 교수는 실험이 끝난 후 35년이 지나서야 ‘루시퍼 이텍트’라는 책을 펴냈다. # 빙상 종목을 시작으로 유도, 태권도, 정구까지 끔찍한 체육계 (성)폭력이 연일 폭로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철저한 조사를 지시하고, 21일에는 대한체육회가 ‘체육계 가혹행위 및 (성)폭력 근절 실행대책’을 이행하기 위한 ‘혁신위원회’를 구성했다. 빙상연맹을 해체하고, 소년체전을 없앤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같은날 '빙상대부'로 불리는 전명규 한체대 교수는 머리숙여 사과했다. 범정부 차원의 체육계 성폭력 대책이 2월 중으로 발표될 예정이다. 워낙에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다 보니 나라 전체가 체육계 (성)폭력 근절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하겠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 그런데 기시감이 든다. 2007년 박명수 우리은행 여자농구팀 감독의 성추행 사건이 우리사회에서 충격을 던졌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런데도 체육계 (성)폭력의 원인은 그대로다. 성적지상주의, 폐쇄적인 체육계 구조, 주종관계에 가까운 사제관계, 2차 피해, 공부하지 않는 학생선수 등 달라진 게 없다. 원 스트라이크 아웃 제도(엄벌주의), 예방교육과 성폭력 발생 시 대응 매뉴얼 강화 등 대책도 흡사하다. 관련 체육단체를 해산하고, 소년체전을 폐지하겠다는 극단적인 대책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해당 종목이 없어지지 않는 한 체육단체는 다시 생기고, 소년체전이 아니더라도 종목별 대회 등이 있기 때문이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꼴이다. 그럴 바엔 아예, 엘리트 체육을 없애자고 하는 편이 낫다. 루시퍼 이펙트가 말하는 ‘악한 제도나 상황’을 원천봉쇄하는 것이다.
# 문제는 체육은 물론이고, 인간사회에서 권력 지배 등의 속성을 과연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안희정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거의 사회 모든 영역, 심지어 가정에서도 인간관계에서 기초한 (성)폭력의 위험성은 존재한다. 지난 16일 국회에서 열린 조재범 성폭력 사태 근본 대책 마련 긴급 토론회에서 김현목 문체부 체육정책과 사무관은 "체육계 성폭력에 대한 제도는 마련이 돼 있지만 실제 체육인들에게 제도가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울림이 크다. 그 어떤 제도도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렵다. 인간사회의 기본관계 중 하나인 엘리트 체육 자체를 없앨 수는 없고, 온갖 대책으로도 그 악의 근원을 뿌리 뽑지 못하니 말이다. # (성)폭력은 선진국도 마찬가지다. 미투도 원래 미국에서 시작된 것이다. 미국 태권도계에서도 극소수 한인사범들의 성추행이 문제가 된 바 있다. 그런데 미국 어바인에 위치한 탤리움 태권도도장의 ‘핑거 터치’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희는 태권도의 정신, 얼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자세를 바로잡다 보면 몸에 손을 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제자의 경우, 사범도 사람이다 보니 성적 충동이 들 수 있지요. 그래서 만든 원리가 '핑거 터치'입니다. 탤리움의 사범들은 제자의 몸을 손끝으로만 터치합니다. 별것 아닐 수 있지만 무예를 한다면, 누군가의 스승이라면 이 정도 고민은 있어야 합니다. 자기 관리가 투철해야만 남을 가르칠 수 있죠.” 탤리움의 창설자인 그랜드마스터 이승형 사범의 설명이다. 그는 1979년 세계태권도선수권에서 우승한 전형적인 엘리트 태권도인이다. 이런 철학을 갖고 있으니 도장은 크게 성공했고, 그는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됐다. 탤리움은 지금도 매년 헬스킥, 즉 사랑의 송판깨기로 매년 지역 아동병원에 후원금도 전달한다. # 다시 루시퍼 이펙트. 인간은 상황과 시스템에 조종당하는, 즉 쉽게 악을 행하고 마는 무력한 존재일까? 짐바르도 교수는 죄인에게 ‘어쩔 수 없어서’라는 면죄부를 주려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강조했다. 지금 우리에게 대입하면 결코 조재범을 옹호하려는 의도는 없는 것이다. 단지 어떤 사람이 원래 악하고, 혹은 선하다는 식의 이분법을 비판하고, 사람은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는 ‘루시퍼 이펙트’를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루시퍼 이펙트를 막기 위해 상황이나 제도를 최대한 인권을 보호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노력들이다.
#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다. 평범한 사람도 악마가 될 수 있다는 루시퍼 이펙트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과 일맥상통한다. 이와 관련해 짐바르도 교수는 ‘영웅적 행위의 평범성’을 내세웠다. 잘못된 상황과 시스템이 악을 양산하고, 대다수가 이에 복종할 때 여기에 저항하는 소수의 영웅이 꼭 존재한다. 그런데 이 영웅도 알고 보면 평범한 이들이다. ‘평범한 영웅’인 것이다. 박명수 감독을 고발한 여자농구선수, 지금의 심석희 선수, 그리고 그들을 도운 주변 사람들, 또 이승형 사범처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어떤 식으로 든 시스템이 만든 악(폭력)에 저항한 이들. 모두가 영웅인 것이다. 잘못을 엄벌하고, 나쁜 시스템에 손을 대는 것은 당연지사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평범한 영웅들을 존경하고, 또 우리 모두 영웅이 되자는 인식을 확산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들에게 존경과 격려의 문자라도 보내는 장이라도 생겼으면 좋겠다. 심석희, 신유용,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이승형 사범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한다. [헤럴드경제 스포츠팀=유병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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