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이 재조명되며 문단 내 성폭력 문제가 다시금 들끓고 있다. 시적 대상인 ‘En선생’으로 거론된 인물은 국내 대표적 원로 시인 고은이다.
지난 6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한 최 시인은 “어떤 시를 써야 하나 고민하다가 ‘내가 이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작가가 아니다. 한국 문단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며 계간지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에 해당 시를 발표한 배경을 밝혔다.
이같은 문제의식을 담은 그녀의 시는 비단 ‘괴물’만이 아니다. 최 시인은 지난 2005년 시집 『돼지들에게』를 통해 위선적인 지식인들의 성적 탐욕과 횡포를 비판한 바 있다. 특히 시 ‘돼지의 변신’은 고인이 된 진보 진영의 한 석학을 연상시키는 내용으로 충격을 안겼다.
다음은 『돼지들에게』에서 발췌.
#돼지의 본질
그는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훌륭한 양의 모범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신분이 높고 고상한 돼지일수록 이런 착각을 잘한다/ 그는 진주를 한번 보고 싶었을 뿐/ 두번 세번 보고 싶었을 뿐…./ 만질 생각은 없었다고/ 해칠 의도는 더더군다나 없었다고/ 자신은 오히려 진주를 보호하려 왔다고…./ 그러나 그는 결국 돼지가 된다/ 그들은 모두 돼지가 되었다.
#돼지들에게
언젠가 몹시 피곤한 오후, 돼지에게 진주를 준 적이 있다/ 좋아라 날뛰며 그는 다른 돼지들에게 뛰어가/ 진주가 내 것이 되었다고 자랑했다/ 허나 그건 금이 간 진주/ 그는 모른다/ 내 서랍 속엔 더 맑고 흠 없는 진주가 잠자고 있으니
(생략) 그날 이후 열 마리의 배고픈 돼지들이 달려들어/ 내게 진주를 달라고 외쳐댔다/ (생략) 그래도 그 탐욕스런 돼지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늙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 번만 달라고….
#돼지의 변신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 그는 여우가 되었다/ 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였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 사람들이 그를 높이 쳐다보면서/ 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냐고 우러러보면서/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그는 자신이 실제보다 돋보이는 각도를 알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 방향으로) 몸을 틀고/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무슨 말을 하면 학생들이 좋아할까?/ 어떻게 청중을 감동시킬까?/ 박수가 터질 시간을 미리 연구하는/ 머릿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 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듯 심각해지는/ 냄새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앞으로도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 차지라는/ 변치 않을 오래된 역설이…나는 슬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