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문영규 기자]‘스페인의 기수, 유럽 왕실에 새바람을 몰고올까.’

198㎝ 훤칠한 키에 만능 스포츠맨,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총각’.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스페인 요트 대표팀으로 출전해 선두에서 국기를 들고 기수로 입장하기도 했던 펠리페(46) 왕세자가 왕권을 이양받고 스페인 왕실의 부활을 이끌어낼지 주목되고 있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2일(현지시간) 재위 39년 만에 퇴위를 발표하면서 “펠리페 왕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을 준비가 됐으며 그의 경험과 젊은 세대의 추진력으로 희망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갈 것이다”고 밝혀 국민에게 변화에 대한 기대감을 안겨줬다.

1975년 40년 독재에 종말을 고하고 민주화를 이끌어낸 카를로스 국왕이 그랬듯 펠리페 왕세자에게도 왕정에 대한 쇄신과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시점이다.

▶새왕의 과제는?=새롭게 왕위에 오를 펠리페 왕자는 실추된 왕가의 권위와 신뢰 회복, 수 년 간 침체를 겪은 스페인 경제 회복이란 난제에 직면해 있다. 아울러 카탈루냐 분리 독립과 같은 정치ㆍ사회적 논란도 해결해야 할 과제 중 하나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공통적으로 스페인 군주제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을 선결과제로 꼽았다.

부왕인 카를로스 국왕은 민주화를 실현하고 쿠데타를 저지하면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최근 부패와 추문으로 왕실에 대한 신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카를로스 국왕의 막내딸 크리스티나 공주 부부는 600만유로(약 90억원)의 공금을 유용한 혐의를 받았고 지난 2월 크리스티나 공주는 왕실 직계 가족으로는 처음으로 법정에서 심문을 받았다.

2012년엔 카를로스 국왕이 아프리카 보츠와나로 호화 코끼리 사냥을 떠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어려움을 겪던 국민들로부터 원성을 듣고 공개 사과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고령의 왕에 대한 건강문제도 제기됐다.

여기에다 카를로스 국왕은 최근 유럽의회 선거결과를 통해 엄청난 정치적 위기의식을 느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왕정을 지지하던 스페인 집권 국민당과 주류 야당인 사회노동당은 스페인 국회 350석 중 296석을 차지하면서 압도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유럽의회 선거에서 두 당이 모두 각각 15%포인트 이상 득표율이 하락했다. FT는 이를 통해 왕실의 정치적인 지배가 힘들 수도 있을 것이란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유럽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좌파연합당과 좌파신당 포데모스는 국민투표를 제안하기도 했으며 오는 7월 당수가 교체되는 사회노동당 역시 왕실에 대한 지지를 이어간다는 보장도 없다고 FT는 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카를로스 왕이 선택한 것이 ‘젊은 피의 수혈’이었다. 호제 이그나시오 토레블랑카 유럽연합(EU)이사회 외교관계 수석연구원은 FT에 “카를로스 국왕은 특권이 줄어들고 있으며 그동안의 호시절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는 대중적인 인기가 일시적으로 하락한 것이 아니었고 헌법적 특권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의 아들에게 바통을 넘기는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펠리페 왕자는 민심회복이란 무거운 짐을 넘겨받은 셈이다.

펠리페 왕세손에 대한 스페인 국민들의 시선은 일단 긍정적이다. 올해 초 설문조사업체 시그마 도스의 조사에 따르면 필리페 왕자에 대한 국민들의 긍정적 여론은 3분의 2에 달했다. 펠리페 왕자가 왕실을 이끌면 스페인 왕실 이미지가 개선될 것이라고 답한 이들도 50% 이상이었다.

수십년 간 국왕 수업을 받아왔고 스포츠를 사랑하며 젊고 건강한 이미지가 국민적인 매력을 상승시킬 것이란 평가다. 어떠한 추문에도 휘말려 있지 않다는 점도 장점으로 꼽히고 있다.

이미 2011년엔 국내외에서 253개 업무를 수행하며 카를로스 국왕보다 더 많은 왕실 일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지난해 9월에는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2020 마드리드 하계올림픽 프리젠테이션을 하는 등 왕실 업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젊은 피로 바뀌는 유럽 왕실=왕정에 대한 고민은 스페인 왕실만이 아닌 대다수 유럽 왕실이 직면한 문제다.

입헌군주제 하에서의 왕실의 역할은 제한적이다. 실질적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역할은 총리에게 있고 왕은 국가의 수장이라는 의미부여를 통해 존경받을 뿐이다.

영국 왕실이 공식적인 정치적 발언을 금기시하고 있듯 정치적 영향력 행사를 스스로 제한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가운데 국민 혈세의 낭비란 국민적 비난이 뒤따르고 장기간의 재위로 국민들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유럽 각국의 왕실들은 이미지 쇄신과 전환을 위해 왕권 교체를 단행하기도 했다.

지난해 4월엔 네덜란드의 베아트릭스 여왕(75)이 즉위 33년 만에 빌럼 알렉산더르(47)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같은해 7월엔 벨기에의 알베르 7세(79)가 즉위 20년 만에 퇴임하고 필리프(54)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기도 했다.

이같은 유럽 군주들의 양위 릴레이는 고령에 따른 건강문제도 있지만 장기 재위로 인한 국민적인 관심이 하락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스웨덴의 칼 16세 구스타프 왕(68)은 지난 1973년부터 스웨덴을 통치했다.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2세 여왕(74)도 1972년 왕위를 계승했다. 두 나라 모두 40년 이상 스페인과 같은 장기간 왕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88세의 고령인데다 62년간 왕위에 머무르고 있어 조기 퇴위 가능성도 제기됐다. 그러나 여왕의 대외 활동이 왕성하고 건강에도 문제가 없어 일각에선 조기 퇴위 가능성이 없다는 주장도 나온다.

문영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