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박근혜 대통령도, 최순실도, 김기춘ㆍ우병우 두 명의 전 민정수석도 “몰랐다”고 했다. 아니라고 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거짓의 의혹, 위증의 논란이 일었다.
국민들과 언론이 가진 ‘정황 증거’로는 거짓일 가능성에 더 무게가 실린다. 진실은 검찰과 특검 수사를 통해 밝혀질 것이다. 일부는 영원히 미궁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다.
심리학적인 수사가 허용된다면, 그들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거짓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모르는’ ‘사실을 부정하는’ ‘기억이 나지 않는’ 어떤 인물을 연기하고 있을 수도 있다. 거짓을 행하는 것과 연기하는 것은 다르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진실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일관된 자아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여기엔 ‘거짓말을 하는 나’가 있고, “‘거짓말을 하는 나’에 대해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판별할 수 있는 또 다른 나”가 있다는 말이다.
반면, ‘연기하는 나’에는 또다른 자아가 없다. 그냥 주어진 역할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마치 관객 앞의 연극배우, 카메라 앞의 영화배우가 보여주는 행위와 같다.
검찰ㆍ특검의 수사를 받는 이들, 청문회의 증언대에 선 이들은 모두 청와대에서는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사건과 기관에 개입하는 권력자”에 충실했을 뿐이고, 지금에서는 “모든 정보에 대해 몰랐으며, 사건과 기관에 개입을 하지 않은 무고한 개인”을 연기할 뿐이다. ‘자아’ 없는 ‘가면’의 바꿔쓰기 혹은 ‘가면’ 그 자체인 ‘자아’.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 아이히만에게서 발견한 ‘악의 평범성’이란 어쩌면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역할에 충실한 개인’으로 수행되고, 최종적으로는 악으로 귀결되는 행위 혹은 연기 말이다. 자기가 쓴 가면을 벗어내 자신의 얼굴을 응시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잃잃어버린 사람들. 가면을 벗는 순간 또 다른 가면이 필요한 사람들.
우디 앨런의 영화 ‘이레셔널맨’의 매력적인 철학교수 ‘에이브’(호아킨 피닉스 분)에게서도 역할극에 깃드는 악을 발견하게 된다. 에이브는 염세주의자였다. 그에게 인생이란 회색 빛의 바다였다. 그는 세상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았다. 그가 알아낸 비밀이란 ‘나’로 하여 세상도, 세상 사람들도 바뀌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는 생의 의지를 일깨우는 자극과 감각을 잃어버렸다. 젊은 시절 왕성한 여성편력을 자랑했지만, 지금은 성적으로 무능력해졌다. 우수어린 눈빛, 고독한 걸음걸이, 그의 입에서 나오는 시와 철학의 인용구들이 여전히 여성들을 매혹시켰지만 말이다.
그런 그에게 변화가 생긴다. 젊고 발랄한 여대생 ‘질’(엠마 스톤 분)을 만난 이후다. 에이브는 질과 데이트를 하는 와중에 식당 옆자리의 중년 여인이 하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된다. 부패한 판사 때문에 여인이 억울한 판결을 당할 위기라는 얘기다. 질은 그 판사가 심장마비에 걸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에이브는 그 판사의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직접 살해하기로 한다. 그 때부터 그는 삶의 활력을 되찾는다. 생의 모든 감각이 돌아온다. 세계는 낙관적인 것으로 변해간다. 그에게 삶의 이유가 생겼다. 나중에 질이 훔쳐본 에이브의 일기장에는 판사의 이름과 함께 이런 글귀가 씌어져 있었다. ‘한나 아렌트를 볼 것/악의 평범성, 라스콜리니코프, 스타브로긴, 키릴로프’
이 메모는 에이브의 판사 살인계획의 참고가 된 것들의 목록이다. 유태계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쓴 나치 전범 재판기록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가 등장한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주인공, 스타브로긴, 키릴로프는 같은 작가의 소설 ‘악령’의 등장인물이다.
에이브는 악을 처단하겠다고 나섰지만, 결국 또다른 악마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이히만을 죽이고자 한 또 다른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을 구현한 인물이 된다.
이 영화에서 에이브로 분한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사뭇 연극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는 에이브가 스스로에게 역할을 부여해 모종의 연기를 행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에이브는 처음에는 ‘염세적인 철학자’를, 두번째는 ‘사회악을 처단하는 라스콜리니코프’를, 마지막으로는 ‘오로지 생존의 욕망뿐인 악마 그 자체’를 연기하는 인물이다.
‘연기’란 무엇일까. 김기덕 감독은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자전적 다큐멘터리 영화 ‘아리랑’에서 어떤 배우가 악역을 잘한다는 것은 실제 그 사람의 내면이 그만큼 악하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사태의 한쪽 면, 일면의 진실일 뿐이다. 무대 위, 카메라 앞에서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배우 자신을 가둔 완고한 자의식의 껍질을 깨는 작업이기도 하다. 배우는 영화 속에서 살인자나 사기꾼을 연기하기도 하지만, 영웅도 되고 성자도 된다. 그들에게 연기란 배우 자신이 가진 자아의 반영 혹은 욕망의 상상적 표현이나 인간 본성의 드러냄이기도 했지만, 자기 마음 속에 숨겨졌던 내밀한 상처의 치유과정이기도 하다. 수많은 배우들의 연기 지도를 맡았던 한 교수는 배우 지망생들의 실기수업 때 자주 공격적인 질문을 던져, 학생들을 울리곤 한다고 했다.
문제는 연극과 인생, 배우와 극중인물 간에 이루는 경계다. 그것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아서 어느 순간이 되면 안팎이 뒤바뀌고, 경계가 해체되며, 결국은 수학자 로저 펜로즈가 창안한 계단이나 삼각형, 악마의 포크 혹은 에셔의 그림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불가능한 도형’이 되고 만다. 현실과 극 사이, 실제 삶과 캐릭터 사이의 위태한 경계가 없어지는 때가 배우들에겐 절대적인 순간, ‘무아의 경지’가 될 것이다. 자아가 없어지고 온전하게 무대와 카메라 앞의 역할만 오롯이 남는 순간이다. 그러나 배우는 언제나 그 자신의 삶, 무대와 스크린 바깥의 세계로 돌아와야 하고, 관객은 배우들의 연기가 만들어내는 가상에 힘입어 고되거나 팍팍한 현실을 환기한다. 연기엔 윤리가 없다. 하지만 연기를하는 자아, 그리고 연기하는 배우가 환기하는 현실은 윤리의 영토를 벗어날 수 없다.
연기에는 윤리가 없다. 그러므로 국민 앞에, 국회의원 앞에, 검사 앞에, 형사 앞에서 “모른다”고 “알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다”고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 그들은, 거짓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예 ‘거짓말 하는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또 다른 자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닐까. 끝없이 가면을 바꾸어 가는 삶만 살면서 자신의 얼굴은 아예 잃어버렸거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청문회를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느꼈을 의문은 당최 풀릴 수가 없다. 어떻게 저런 엘리트들이, 저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저렇게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저렇게 멀쩡한 사람들이, 그런 짓을 했을까. 그리고 지금에 와서 그토록 뻔뻔한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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