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누구에게나 찌질했던 시절이 있다. 웹툰작가 김풍에겐 그가 ‘김정환(김풍 본명)’이었던 삼수생 시절 혹은 ‘찌질의 역사’를 연재하기 직전 작가로서의 열패감을 안던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김풍을 처음 만난 건 18년 전이었다. 1998년 그는 삼수생 신분에도, ‘나이트 죽돌이’였다. 그 시절 우리에겐 “‘인기가요’를 녹화해 신곡 안무를 외우는 것”이 중요했다. ‘힙합 전성시대’라 자부했기에, 허니패밀리처럼 ‘프리스타일 랩 배틀’을 벌였다. 김풍은 8mm 비디오 카메라로 일상의 흔적을 남기기를 좋아했다. 그의 집에선 언제나 ‘천리안' 혹은 '하이텔’이 접속 중이었다. 그는 PC통신 1세대였다.
어느날 그가 TV에 등장했다. 그 옛날 나이트 댄스 대회에 나갈 때 썼던 ‘닉네임’이 그의 예명이 됐다. 인기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에서 따온 이름이다. 김풍은 현재 인기 웹툰작가이자 스타 방송인이 됐다. “어르신들은 내가 요리사인 줄 알아. 하하. 근데 그것도 좋아. 캐릭터가 두 개인 것 같잖아.” 신기한 장면이었다. 삼수생 김정환은 어떻게 웹툰작가 김풍이 됐을까. 연재 중인 ‘찌질의 역사’ 시즌3에서 주인공 민기가 방송기자가 된 것처럼, 그의 삶에도 ‘개연성’은 있었다.
그 시절 자기 하나로 충만해보였던 김풍은 18년이 흐른 지금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타인에 대한 이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됐다. 최근 와이랩 사무실에서 김풍 작가를 만났다.
▶ 1세대 웹툰작가…“뽀로로는 비교도 안됐어”=‘PC통신 1세대’라 자부하는 김풍 작가는 스스로를 ‘인터넷 문화의 수혜자’라고 말한다. 미디어의 변화에 ‘예민한 촉’을 세우고 살았던 지난 시간이 지금의 김풍을 있게 했다.
“2002년 월드컵이 끝날 무렵이 한창 인터넷 문화의 중흥기였어. 그 때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됐고, 사람들은 자기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는거야.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된거지. 디카는 사진만 찍으면 바로 올라가니 얼마나 쉽고 간편해. 사람들의 참여형 콘텐츠가 만들어지면서 인터넷 문화가 시작된거야.”
디씨 인사이드는 인터넷 문화를 촉발하고, 댓글문화를 만든 사이트였다. 정보, 사상, 반응을 공유하며 “그들만의 소속감을 느끼는 그 세계가 너무 재미있었다”고 한다.
김풍의 첫 만화 ‘폐인의 세계’가 처음 공개된 곳도 ‘디씨 인사이드’였다. “그 땐 웹툰이라는 말이 없었잖아. ‘폐인의 세계’ 습작만화를 올렸는데 반응이 좋더라고. 근데 갑자기 없어진 거야. 그래서 디씨에 물어봤더니 카툰 갤러리를 만들어주겠다고 하더라고. 이거 팩트야!”
‘폐인의 세계’를 계기로 디씨 인사이드엔 ‘카툰 갤러리’가 처음으로 생겼다. 그게 출발이었다. 이후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웹툰 서비스를 시작했고, 강풀 작가 등과 함께 제안을 받아 웹툰을 그리게 됐다. 2003년이었다. 그 시절 김풍은 ‘내 만화는 하나포스를 타고 흐른다’는 슬로건과 함께 통신사 CF를 찍어 인생의 첫 번째 전성기를 맞았다.
다음 포털로 넘어와 ‘폐인가족’의 연재가 시작됐고, 초기 SNS로 불리는 싸이월드 미니홈피를 통한 스킨과 미니미 사업까지 붐을 탔다. 캐릭터 회사를 운영하며 김풍은 어린 나이에 짜릿한 시간들을 만났다. “그 때 ‘뽀로로’는 ‘폐인가족’한텐 비교도 안됐어. 저 아래 있었잖아. 하하.”
“인생의 단 맛을 너무 빨리 보게 됐다”고 고백한다. “노력해서 성공했다기 보다 상황이 좋았어. 한 발 먼저 웹툰을 시작했고, 캐릭터에 꽂혀 비지니스로 풀었던게 잘됐던 거야. 사실 작가로서의 고뇌나 소명의식이 없었어.”
“놀기 바빴고, 일하긴 싫었고, 클럽은 즐겁던” 시절이었다. 빠른 성공은 오랜 정체기를 불러왔다. 웹툰 시장의 발전 속도가 빨랐고, 다른 작가들이 한 걸음씩 나아갈 때, 그는 제자리였다. “그 땐 내가 작가라고 말하고 다니지도 않았어. 그냥 캐릭터 회사 이사. 음…만화가보다 캐릭터 회사 이사가 훨씬 좋잖아. 하하.”
“명함만 가지고 싶었을 뿐 회사의 일에 대한 의지”는 없었다고 한다. “만화를 그려야 캐릭터가 잘 되는데 놀러다니기 바빠 캐릭터 개발로 안하고…” 서른이 돼서 회사를 나오고, 영화잡지에서 1년간 기자생활을 했다. 난데없이 연극에 꽂혀 극단에 들어갔다. “하고 싶은 건 다했는데” 정작 작가로의 삶을 살진 못했다. “남들은 서른쯤 뭔가를 이뤄가는데 난 도리어 떨어진 상황이 된거야. 월급도 없고.” 그 때 그린 웹툰(싸드 아일랜드)는 쫄딱 망했다.
▶ “‘찌질의 역사’ 이전 시기엔 내겐 ‘찌질의 역사’”=‘찌질의 역사’가 태어나기 전 그는 또 한 번 인생의 변화를 맞는다. 김풍 작가가 ‘야매요리’ 전문가가 된 계기였다.
“웹툰이 잘 안 되니까 선뜻 다시 도전을 못 하는거야. 두려웠던 거야. 그걸 트위터로 풀었어. 한두 마디 던지면 사람들이 공감해주고, 라면 끓여 올리면 반응해주고…” 그게 화제가 돼 올리브 채널의 ‘올리브쇼2012’에 출연하게 됐다. ‘만만한 레시피’라는 9~10분짜리 코너였다. “김풍은 가게 차리는게 적성에 맞겠네!” 이런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렸다고 한다.
김풍 작가는 그 시절 자신을 가장 ‘찌질했다’고 돌아봤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데 기분이 안 좋더라고. 나도 작가가 되고 싶은데… 열등감이 생기고, 자격지심이 드는 거야. 다른 작가들 작품 보면서 이게 왜 재밌어? 질투심만 가득하고. 늦잠 자고 술 마시고 트위터 하면서 옛날에 잘 나갔던 얘기만 하고 앉아있고. 사실 이게 찌질한 거야.”
하지만 거절에 대한 트라우마로 쉽사리 시도하지 못했다. 웹툰작가로 다시 발을 딛기까지 준비기간은 5년쯤 됐다. 당시 일본 연재물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공포물이었다.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2년간 고치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며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았다. “그러면서 자신감이 생겼지.” ‘힐링’이 필요했던 때였다고 한다.
“‘건축학개론’ 보고 완전 꽂혀서 나도 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민기의 이야기가 꼭 내 얘기는 아니야. 당연히 나의 감정은 많이 들어가있지만, 도리어 여자 캐릭터에 더 몰입하게 돼. 민기의 패악질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었는지, 그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 말이었는지를 표현해야 하니까. 독자들도 거기에 더 공감하거든.”
‘찌질의 역사’ 속 민기는 첫사랑 여자친구를 잊지 못해 같은 이름의 여자를 반복해서 만나며 ‘더이상 잃을게 없는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 독자들은 “민기, 얘 또 시작”이라고, “속 터져 미치겠다”는 반응을 내놓는다. 시즌3은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사회적인 지위가 생기고, 잃을 게 많은 상황이 되면 그 안에서 또 다른 찌질함이 나오잖아.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고.” 방송기자라는 직업을 민기에게 준 계기였다. 30대 중반이 된 민기는 20대였던 시절과는 달리 자기 것을 지키려는 모습으로, 혹은 노련하게 상황을 모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도 그게 아닌 것처럼 흘려보내는 모습으로 ‘찌질함’이 그려진다.
‘찌질의 역사’는 애초 시즌을 염두한 작품은 아니었다. 99학번 대학생의 이야기는 독자들의 연령층을 높였다. ”웹툰은 10대를 못 잡으면 안되거든. 그래서 애초에 히트할 거라는 기대를 안 했어. 단편으로 빨리 끝내고 다른 걸 하려고 했는데 반응이 좋았던거야.”
웹툰의 히트는 결국 영화로 이어졌다. ‘찌질의 역사’는 영화로 리메이크돼 개봉할 예정이다. 현재 시나리오 작업에 한창이다.
“‘찌질의 역사’는 신박한 아이디어가 있는 웹툰이 아니잖아. 너무 뻔한 사랑이야기, 흔한 로코야. 오로지 공감이 포인트야. 근데 이 웹툰은 사실 연애이야기가 아니라 성장이야기거든. 영화도 거기에 초점을 맞춰 잘 압축해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
김풍 작가에게 ‘찌질의 역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할 수 있고”, “감정을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작품이다. 연재는 초반이지만, 이번 시즌은 김풍 작가에게 “심정적인 마지막 시즌”이다. “물론 아쉽다 싶으면 중간에 건너 뛴 이야기로 돌아가거나, 친구들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웃음)”
웹툰을 통해 작가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예능(JTBC 냉장고를 부탁해)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와 만나는 그는 ‘찌질함’이라고는 찾기 힘든 ‘유쾌하고 쿨한’ 이미지의 방송인이다. “얼마나 좋아. 그건 되게 안전한 놀이기구를 타는 거야.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를 방송에서 드러낸다는 건 내 패를 다 보여주는 거잖아.” 주호민 작가와는 네이버 V앱의 ‘풍기문란’을 진행 중이다. “일주일 중 제일 크게 웃는 시간이야. 요즘엔 호민이랑 이야기하는게 제일 재밌어. 행복은 결국 사람인 것 같아.”
다소 양면적인 모습으로 두 매체를 오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작가로서의 작업과 방송 일은 에너지의 쓰임이 달라” 오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방송처럼 말을 많이 해야하는 직업은 에너지를 밖으로 내보내는 거야. 작품을 하려면 에너지를 응축해야 해서 뽑아내야 하는 거고. 늘 쉽지 않아. 근데 노력하는 거지.”
김풍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가 더 많아져도 그는 환영이다. 누군가에겐 웹툰작가, 누군가에겐 방송인, 누군가에겐 요리사. 또 다른 누군가는 그를 새로운 직업으로 인식할 수도 있다. ”뭔가를 끊임없이 하고 싶어. 꼭 웹툰이 아니더라도, 창작을 하고 싶은 거야. 겁이 나는 건, 내가 더이상 시력이 안 좋아져서,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그림을 못 그리게 될까봐, 그런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있어.” 차기작에 대한 구상도 이미 나왔다. “사실 생각하는게 몇 개 있어. 제대로 상업적인 거. 좀 더 거시적으로 보고, 아이디어로 접근하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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