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 브라질.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삼바와 축구, 아마존의 나라로 기억된다. 상파울루에서 서울까지 24시간이 넘는 비행시간과 12시간의 시차. 이러한 거리감만큼 브라질을 비롯한 남미 대륙은 오랫동안 우리 통상 지도의 변방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남미가 유럽연합(EU)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지렛대 삼아 세계 통상 질서의 중심 무대로 걸어 나오고 있다.
남미 대륙을 대표하는 경제블록은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이다. 블록 내 국내총생산(GDP)의 약 70%를 차지하는 브라질을 필두로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가 주축을 이루고, 최근 볼리비아까지 합류했다. 하지만 이 시장은 그간 미국, 중국 등에 밀려 우리 기업들의 우선순위에서 비켜 나 있었다.
하지만 판이 바뀌고 있다. 20여 년의 긴 협상 끝에 EU-메르코수르 FTA가 체결됐고, 오는 5월 1일부로 잠정 적용된다. 전 세계 GDP의 25%, 인구 7억명 규모의 EU-메르코수르 거대 경제권이 출범하고, 잠겨있던 남미 시장의 빗장이 열리게 됐다. 대표적으로, 35%에 달하는 메르코수르의 자동차 관세가 1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철폐될 예정이다.
유럽 기업들 앞에 새로운 기회의 문이 열린 지금, 우리 기업들 역시 발 빠른 대응이 요구된다. 남미 시장 개방이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반사이익과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EU는 이번 협정을 통해 산림파괴방지규정(EUDR) 등 유럽식 환경·공급망 규범을 남미에 확산시키려 하고 있다. 이미 한-EU FTA를 통해 EU 규범에 익숙해진 우리 기업에는 오히려 유리한 경쟁 무대가 될 수 있다. 선진 규범 준수 역량이 곧 남미 수출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남미의 대EU 농산물 수출 확대는 우리의 농기계, 친환경 농약, 스마트팜 기술의 수요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디지털 인프라 확충 과정에서는 반도체, 데이터센터, 스마트 제조 분야의 기회가 열린다. 우리 기업의 남미 생산시설이 몰려있는 브라질을 대EU 수출기지로 활용하는 방식도 검토해 볼 만하다.
이러한 시점에 지난 2월 브라질 룰라 대통령의 국빈 방한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양국은 수교 67년 만에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통상, 과학기술, 농업, 보건 등 핵심 분야에서 10건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4개년 행동계획(2026~2029)’을 채택해 중장기 협력의 기반을 마련했다. 특히 한-메르코수르 FTA 협상 재개 필요성에 대한 양국 정상의 공감대는 향후 남미 통상 전략을 구체화하는 핵심 동력이 될 것이다.
결국 판을 먼저 읽고 짜는 자가 중심에 서기 마련이다. 10건의 MOU와 4개년 행동계획, 그리고 FTA 협상 재개 의지는 남미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중요한 통상 인프라다. 정부 차원의 첫걸음은 이미 내디뎠다. 남은 과제는 외교적 성과를 기업 현장 비즈니스와 글로벌 공급망으로 연결하는 일이다. 상파울루 현지에서 바라본 남미는 더 이상 글로벌 통상 무대의 변방이 아니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 기업들이 새로운 통상 질서의 중심에 서기를 기대한다.
이승형 한국무역협회 상파울루사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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