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안녕하세요. 맛있는 이야기 ‘미담(味談)’입니다. 인간이 불을 집어든 날, 첫 셰프가 탄생했습니다. 100만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들은 음식에 문화를 담았습니다. 미식을 좇는 가장 오래된 예술가, 셰프들의 이야기입니다.
정하완 기가스 셰프 인터뷰
500년 역사 종택 텃밭 농산물로
‘한국식 지중해 요리’ 정수 완성
미쉐린 1스타·그린스타 동시 등재
“좋은 농산물 가치 인정받는 시장 형성되길”

[헤럴드경제=채상우 기자] 경기도 군포 수리산 자락에는 수려한 자태의 동래정씨(東萊鄭氏) 동래군파 종택(宗宅)이 있다.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정광필(鄭光弼·1462~1539)이 자리를 잡은 뒤, 후손들은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터를 지켜오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강점기, 6.25 등 끔찍한 참변에서도 흔들림 없이 터를 지켜온 정씨 집안의 강직한 가풍의 상징이기도 하다.
종택의 한 켠에는 그 긴 시간을 함께 한 작은 텃밭이 있다. 쌈채소, 딸기, 콩, 온갖 허브들까지 계절에 따라 수십 종의 작물이 이곳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가족의 밥상을 책임졌던, 텃밭의 작물들이 세계인을 감동시킨 요리로 재탄생했다. 이를 실현한 인물은 동래군파 18대손 정하완 셰프다. 미슐랭 1스타와 그린스타에 오른 그의 요리에는 500년을 살아온 텃밭의 혼(魂)이 깃들어 있는 듯 하다.

‘자연주의’를 추구하는 정하완 셰프 요리의 주인공은 텃밭에서 재배한 채소들이다. 그가 하는 지중해 요리는 최소한의 조리 과정으로 식재료의 살아있는 식감과 향이 돋보이는 게 특징이다. 그만큼 식재료의 질이 중요하다. 육류의 경우에는 돈만 있다면, 어디서든 좋은 식재료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채소는 건강하고 맛있는 채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 정하완 셰프는 이런 문제의 해답을 텃밭에서 찾았다.
“좋은 농산물은 좋은 땅에서 천천히 키워야 해요. 그렇게 키운 농산물은 풍미가 강하고 농밀한 맛을 가지고 있어요. 대규모로 빠른 시일에 키워야 하는 일반적인 농장에서는 어려운 일이죠.”
정하완 셰프는 종택에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부모님을 따라 농사를 지으며 성장했다. 지금도 매주 월요일·화요일이면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다. 요즘에는 딸기와 눈물콩 등이 맛있게 자라고 있다고 한다.
맑은 숲의 공기를 마시며 살아온 그는 선천적으로 라면이나 떡볶이 등 자극적인 음식을 먹지 못한다. 자극적인 요리를 먹으면, 탈이 나고 심하면 얼굴이 발갛게 부어오른다. 담배는 일체 하지 않고 술도 아주 가끔 와인을 하는 정도다. 그 결과 정하완 셰프는 극도로 예민한 후각과 미각을 가졌다. 섬세한 감각은 셰프로서 굉장한 강점이 됐다.
“모두가 힘들 거라 했던 ‘팜투테이블’, 제겐 너무 즐거운 일”

정하완 셰프가 농사를 직접 지어 요리를 하는 ‘팜투테이블(Farm To Tabe)’을 한다고 했을 때 주변의 셰프들은 서울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만류했다. 군포에서 농사를 지어 서울까지 올라오는 수고로움과 비용을 끝내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정하완 셰프는 ‘그저 즐겁기만 한 일’이라고 말한다. 주변의 부정적 시선에 휘둘리는 일은 결단코 없다는 게 정하완 셰프의 삶의 방식이다.
“저는 한 시간이라도 허투로 쓰는 일이 없어요. 요리를 하고, 농사를 짓고, 운동을 하고, 좋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면서 일주일을 쉬지 않고 보내죠. 그게 즐거워요. 즐거운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요리를 하는 것도 농사를 짓는 것도 전부 제게는 즐거운 일인 거죠. 처음 팜투테이블을 한다고 했을 때 모두가 말렸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시선은 전혀 의식도하지 않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누군가 그것을 인정하고 좋아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거든요.”

정하완 셰프가 팜투테이블을 어려움 없이 한 또 다른 배경에는 유럽에서의 삶이 있다. 요리에 대한 열망으로 2009년 유럽행을 택한 정하완 셰프는 유럽의 여러 레스토랑에서 경험을 쌓고 스페인의 무가리츠(Magaritz)왁 독일의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 라 비(La Vie) 헤드셰프를 거쳐 2021년 한국에 돌아와 기가스를 열었다. 유럽에서 팜투테이블은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도 별다른 어려움 없이 팜투테이블을 자신있게 추진할 수 있었다.
“유럽 어디든 팜투테이블은 특별한 게 아니었어요. 채소를 주력으로 내세우는 레스토랑이라면 어떻게 보면 당연한 듯 팜투테이블을 하고 있어요. 제가 일한 레스토랑 역시 팜투테이블을 했고요. 그 경험이 체득돼 한국에서도 팜투테이블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 것 같아요. 저 역시 팜투테이블을 레스토랑 어디에도 내세우고 있지 않아요. 제게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에요.”
정하완 셰프만의 ‘한국식 지중해요리’, 미식가들 입맛 사로잡다

정하완 셰프의 요리에 특별함이라 한다면, 지중해 요리를 한국식으로 풀어냈다는 점이다. 정하완 셰프는 한국에서 아무리 지중해 요리를 똑같이 만들어낸다 한들, 그곳의 정취를 100% 재현할 수 없다고 한다. 완벽한 카피일뿐, 진짜는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기에 오로지 기가스에서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지중해식 요리를 만들어 기가스만의 정취를 선사하기로 했다.
“채소만이 주는 쾌락이 있어요. 사람들은 엑스트라 취급하지만, 정말 좋은 채소는 그 존재만으로 요리의 변주가 되고, 방향키가 되죠. 생각해보세요, 이국의 땅에서 먹은 요리를. 맛있는 고기 맛으로 그때의 정취가 다시 떠오르나요? 아니요. 향신료가 만들어내는 그곳만의 독특한 향이 다시금 이국의 정취를 상상하게끔 만들어요. 향신료는 결국 채소의 향이죠. 채소의 쾌락이란 건 어쩌면 그런 감성적인 것과 맞물려 있을지 몰라요.”
기가스의 ‘추자도 고등어, 백향과’는 추자도 고등어를 아랍식 초절임인 ‘에스카베체’ 방식으로 조리한 요리다. 고수 씨앗과 제피 가루, 백향과를 식초에 넣어 절인 추자도 고등어는 상큼함과 추자도 고등어의 녹진한 감칠맛이 어우러진다. 여기에 백향과로 만든 이탈리안식 소스 사바용과 레몬으로 만든 퓨레, 고수로 만든 크림을 곁들이고, 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허브를 올려 다양한 향과 풍미를 선사한다.

정하완 셰프의 농장에서 키운 눈물콩과 딸기로 만든 디쉬는 그가 지향하는 지중해식 요리의 정수를 보여준다. 눈물콩, 딸기, 버팔로 부라타 치즈, 올리브 오일의 심플한 조합이지만 최소한의 조리법으로 완벽한 맛의 조화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농장에서 수확한 딸기에서 느낄 수 있는 응축된 향은 풍부한 부라타 치즈와 만나 오귀스트 르누아르 화풍이 입안에 펼쳐지는 듯한 화사함을 느끼게 한다.

6월에는 한련화를 이용한 디쉬를 맛볼 수 있다. 한련화 비네가 셔벳과 황금향 사바용, 금귤류 부슬린, 한련화 에센스, 소렐 셔벳에 올리브 오일을 뿌리고 위에 한련화를 올린 디쉬는 향긋한 한련화와 시트러스한 황금향·감귤류의 향이 어우러진다. 와사비같은 한련화의 알싸하고 달큰한 매운맛이 입을 즐겁게 만든다. 꽃을 단순히 장식으로만 사용하는 이들도 많지만, 정하완 셰프는 꽃을 사용함에는 분명한 맛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성재 셰프가 ‘꽃을 이유없이 이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에 100% 공감해요. 이유 없이 장식을 위해 식재료를 사용하지 않고 있어요. 식재료는 맛에 있어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해요. 그렇지 않다면, 식재료의 무의미한 희생일뿐이에요.”
정하완 셰프는 한국에서도 높은 품질의 채소가 가치를 인정받고, 생산 소비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기를 바라고 있다. 정하완 셰프는 한국 소비자의 수준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분명히 소비자들이 좋은 채소의 가치를 인정하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의 소비자 수준은 생각보다 높습니다. 맛에 진심이랄까요. 기가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높은 수준의 채소에 대한 소비자의 니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앞으로 분명, 높은 품질의 채소의 가치가 인정받고 그를 위한 시장이 형성되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런 분위기가 감지되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니깐요.”
123@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