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서강희 음악 조감독, 테크니션 이중민
배우보다 많은 악기…무대 위 최대 29대
최고가 에릭 클랩턴 시그니처 어쿠스틱 기타
피아노부터 만돌린까지, 총구매비는 1억원
뮤지컬 ‘원스’의 ‘falling slowly’
뮤지컬 ‘원스’에서 이충주 박지연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낡고 오래된 펍(PUB), 따뜻한 조명 아래로 더블린에 사는 무명의 뮤지션 가이(guy)와 체코 출신의 이주민 걸(girl) 나란히 앉는다. 첫 만남에 ‘급진전’하는 관계. 청소기를 고치다 말고 ‘가이’의 음악 이야기를 듣는 ‘걸
’. 가이는 상처를 감춘 ‘다정한 개그캐’인 걸에게 속절없이 빠져든다. “자고 가요.” 아뿔싸, 급해도 너무 급했다.
그 때, 우측 벽면에 우두커니 앉아있던 안드레이(김민성)에게 조명이 들어온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기타 연주로 부르는 노래.
“그렇게~서두르면 ~ 안돼.”
노래 제목도 딱히 없다. 애드리브처럼 들어간 단 두 마디에 객석은 웃음바다가 된다. 뮤지컬을 번역한 황석희는 “오리지널 공연에선 웃음이 터지지 않는 장면인데 한국 공연에서만 빵빵 터진다”고 귀띔했다. ‘신 스틸러’가 돼버린 이 곡을 부르기 위해 배우 김민성은 에릭 클랩턴 시그니처 어쿠스틱 기타를 손에 들었다.
서강희 악기 조감독은 “딱 두 번 부르기 위해 이 악기를 구매했다”며 “비싼 만큼 몇 번 더 써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도 했지만 모든 악기가 정해진 자리에서 자신의 몫이 있어 아쉬움을 삼켰다”고 했다.
![뮤지컬 ‘원스’ 이중민 악기 테크니션(오른쪽), 서강희 음악조감독 [신시컴퍼니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08/news-p.v1.20250502.9f3d8a42bb7c4223a85d14aca510f3ff_P1.jpg)
뮤지컬 ‘원스’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언제 어디서나 등장해 전체를 아우르고, 때론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때론 달달한 목소리로 관객의 마음을 휘저어놓는다. 피아노부터 만돌린까지, 무대 전체에 오르는 것만 해도 총 29개. 배우보다 많은 숫자다. 한 곡당 많게는 다양한 종류의 12대의 악기가 투입된다. 이 뮤지컬엔 오직 ‘악기만을, 악기만의, 악기를 위한’ 시간이 따로 있다.
사전 레슨 시간만 6개월 …40년차 배우도 밥만 먹고 기타 연습
‘원스’ 무대는 배우와 연주자의 경계가 없다. 보통의 뮤지컬은 다양한 규모의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도맡지만, 이 무대에선 총 12명의 배우가 춤도 추고 연기도 하고 연주도 한다. 사전 연습 시간만 무려 6개월. 기타 코드도 잡지 못하는 초보 연주자들에게 베테랑 프로 뮤지션들이 달라붙어 A부터 Z까지 일타강사처럼 가르치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 ‘프로들의 눈’엔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나 나름대로 연주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취미반이나 ‘같은 수준’이긴 매한가지다.
‘원스’의 음악 조감독이자 노라조의 기타리스트로 함께 하는 서강희 조감독은 “레슨 시작 초반엔 ‘원스’의 곡은 알려주지 않고, 한 달 내내 기본기 수업만 했다”고 말했다. 미술로 치자면 “계속 선만 긋거나 동그라미만 그리는 수업”이라고 한다. “생각만 해도 재미없는 수업”이었지만, 3개월 동안 이어질 무대에서 배우 모두가 연주자가 돼야 하는 만큼 ‘기본기 수업’은 필수였다.
그 현장을 진두지휘한 사람이 서강희 조감독이다. 그는 “단지 프로 수준으로 연주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 이전에 각 배우의 성향, 성격에 맞는 맞춤형 레슨을 하는게 특히 중요했다”며 “김문정 감독님 옆에서 10여년간 어떻게 배우와 호흡하는지를 봤는데, 내향형에 INFP(중재자)인 내겐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며 웃었다.
뮤지컬 ‘원스’ 오디션 및 연습 영상
뮤지컬 ‘원스’ 오디션 및 연습
‘원스’에서 그의 역할이 다양하다. 오디션 과정에선 김문정 음악감독을 도와 악기를 다루는 역량과 가능성을 보고 피드백을 줬고, 개막 전까지 제로 수준의 배우들을 뛰어난 수준의 연주자로 ‘육성’하는 것이었다. 개막 이후엔 현장에 급습해 ‘잔소리꾼’을 도맡고, ‘매의 눈’으로 부족한 점을 찾아낸다. 더불어 ‘원스’ 배우들이 버스킹을 갈 땐 모든 노래의 편곡을 맡았다. 버스킹에서 뮤지컬 넘버 중 배우들이 성별을 바꿔 서로의 노래를 부르기에 편곡 작업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다.
서 조감독이 부재할 때 현장에서 멤버들을 아우르고 자발적 연습을 이끈 ‘음악 캡틴’도 있었다. 대한민국 ‘액터 뮤지션’의 시초 격인 바이올리니스트 고예일이다. ‘가이’가 그토록 잊지 못하는 전 여자친구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평생을 살아온 그는 2018년 뮤지컬에 뛰어들었다. “인성부터 실력까지 모두 갖춘 사람이 배우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에 고예일 배우를 음악 캡틴으로 두고 모든 배우가 어우러져 스스로 연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는 것이 서 조감독의 설명이다.
배우들은 손가락이 찢기고 부르트며 연습에만 매진했다. ‘원스’의 스윙 배우인 김경민은 뮤지컬에서 가장 많은 악기를 다루는 주인공이다. 기타, 베이스, 드럼, 카혼, 퍼커션, 피아노 등 총 10개를 다룬다. 현악부터 타악, 건반까지 섭렵하는 놀라운 재능이다. 안드레이 역의 김민성은 우쿨렐레, 베이스, 기타, 카혼 등 네 개의 악기를 다룬다. 김민성은 이 작품을 위해 처음으로 베이스를 배웠다. 서 조감독은 “오늘은 무슨 수업이 있다고 예고하면 김민성, 김경민 배우는 모든 곡을 다 외워왔다”며 놀라워했다.
연습 과정은 모두에게 치열했다. 40년차 배우 박지일은 “‘원스’는 일 년 가까이 준비했다”며 “그동안 다양한 작품을 했지만, 한 작품당 들였던 공의 10배는 투자했다”며 웃었다. 서 조감독은 “선생님들께선 레슨을 하면 신세계를 만난 것마냥 모조리 흡수하고 받아줬다”고 했다. 배우 이충주 역시 이번 작품을 통해 기타를 처음 만져봤다. 서 조감독은 “(이충주는)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시작했다. 정말 대단한 것은 이 역할을 하겠다고 한 순간부터 자신의 모든 삶의 패턴을 ‘원스’에 맞추고 허구한 날 연습 영상을 보내왔다”며 “밥만 먹고 기타만 쳤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뮤지컬 ‘원스’ 악기방에서 보관 중인 어쿠스틱 기타 [신시컴퍼니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08/news-p.v1.20250502.a16ac229beb64b20ba0d57918d9b9a39_P1.jpg)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공을 들이며 나날이 성장하는 각자의 연주를 듣게 되면 배우들에게도 자신감이 붙는다. 김문정 감독이나 서 조감독이 방문하지 않는 공연 날 배우들은 날개를 단 듯 규칙을 벗어난다. 서 조감독은 “정말 재밌는 건 제가 없거나 김문정 감독님이 안 계실 때 애드리브를 정말 많이 하는 점”이라며 웃었다.
무대에 오르는 악기는 총 29대…매주 기타줄 교체에만 30만원
다시 무대에 오르기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다. 제작사 신시컴퍼니에 따르면 뮤지컬 ‘원스’는 다른 작품과 비교해도 워낙 높은 공력이 드는 작품이다. 배우들의 오디션, 사전 악기 연습 기간, 완벽한 합을 맞춰가는 모든 기간을 더하면 1년도 부족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작품이라면 굳이 들어가지 않는 지출이 발생한다. 이 뮤지컬의 주인공 ‘악기’ 때문이다. 무대에 오르는 악기는 최대 29대지만 ‘원스’를 위해 대기 중인 악기는 총 54대다. 어쿠스틱 기타(통기타) 14개, 만돌린 5개, 하모니카 5개, 바이올린 4개, 멜로디카 3개, 아코디언 3개, 첼로·벤조·베으스·피아노·드럼이 각각 2대가 있다. 공연에 필요한 악기는 물론 여분으로 가지고 있어야 할 악기까지 넉넉히 갖춰져 공연장 악기실에서 대기 중이다.
신시컴퍼니에선 이 모든 악기를 이번 공연을 위해 싹 다 구매했다. 총 구매 비용은 1억원 정도. 이 중 가장 고가를 자랑하는 악기는 안드레이가 연주하는 어쿠스틱 기타다. ‘기타의 신’으로 불리는 에릭 클랩턴 시그니처인 000-28EC다. 가격은 600~700만원 수준. 에릭 클랩턴 시그니처를 비롯해 대부분의 악기가 수백만 원대에 달하는 만큼 악기도 곱게 모셔야 하는 귀중품일 수밖에 없다.
![뮤지컬 ‘원스’ 악기방 [신시컴퍼니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08/news-p.v1.20250502.36edb7586fd44cb5a01c8cbcfe333fe3_P1.jpg)
공연장 한쪽에 자리한 악기방은 스태프 모두가 입을 모으는 ‘로열 스페이스’다. 이 공간과 ‘원스’의 모든 악기를 돌보는 주인공은 기타리스트 이중민. 그는 “사람 살기 가장 좋은 온도·습도가 악기에도 최적의 상태”라고 말한다. ‘귀한 분’들의 파손을 막기 위해 온도는 20~25도, 습도는 44~55%를 유지하고 있다. 습도가 높으면 악기는 뒤틀리고 낮아지면 쪼그라들기 마련이다. 2월에 개막했던 만큼 초반엔 가습기를 틀어두며 습도를 유지했다. 김문정 음악감독은 “악기방 컨디션이 모든 대기실 중 가장 좋다”고 말할 정도다.
이중민 악기 테크니션은 ‘원스’의 모든 순간을 함께 한다. 서 조감독은 “중민이가 없으면 ‘원스’는 돌아가지 않는다”며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가 하는 일이 엄청나게 많다. 제작 과정에서 악기 구매부터 시작해 악기 관리, 연주를 위한 튜닝 등 모든 것을 도맡는다.
‘악기 테크니션’의 업무는 매일 오후 2시 30분경부터 시작이다. ‘원스’ 배우와 스태프들의 ‘콜타임’은 웜업을 시작하는 오후 5시 25분이나, 이중민 테크니션은 사전 준비를 해야 할 게 많아 2~3시간 전에 공연장을 찾는다.
그는 “한 주의 첫날인 화요일엔 가장 먼저 총 14대의 기타줄을 전부 교체해 일주일의 공연 동안 잘 유지될 수 있도록 한다”며 “특히 음향 소리를 내기 위한 배터리의 수명 관리, 기타를 닦는 작업, 악기의 온도, 습도 관리를 한다”고 말했다. 기타 한 대당 공연에 올라갈 수 있는 ‘최적의 상태’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시간은 10분이다.
![뮤지컬 ‘원스’ 이중민 악기 테크니션, 서강희 음악조감독 [신시컴퍼니 제공]](https://wimg.heraldcorp.com/news/cms/2025/05/08/news-p.v1.20250502.0455a42c42484639a6ba8ce20e830e63_P1.jpg)
게다가 악기를 반짝반짝 광내는 일도 그의 몫이다. 굳이 불필요한 일처럼 보이나, 악기의 얼굴이 매끈해야 관객도 보기도 좋기 때문이다. ‘뱅크 매니저’ 곽희성이 잡은 기타와 첼로는 고충이 많다. 이중민 테크니션은 “곽희성 배우가 손에 땀이 많아 기타를 한 번만 잡아도 손 모양이 그대로 남는다”며 “때문에 희성 배우의 기타는 특별히 더 열심히 닦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공연 중엔 곡마다 달라지는 악기를 세팅하고, 비상 상황에 대비해 대기한다”고 했다.
보통의 프로 뮤지션이라면 기타줄을 일주일에 한 번씩 교체하지 않지만 ‘원스’에선 수시로 관리한다. 서 조감독은 “나무로 만드는 악기인 만큼 온, 습도의 변화로 영향을 받아 줄의 높이가 너무 떠버리거나 줄이 오래돼 녹이라도 생기면 초보 배우들은 바로 연주에 영향을 받는다”고 설명했다. 게다가 매일 무대 위에서 뜨거운 조명을 받고 배우들의 땀에 젖는 상황에선 줄이 끊어질 가능성도 높아진다.
때문에 두 사람은 늘 배우들이 연주하기에 무리가 없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준다. 한 대당 들어가는 기타줄 가격은 무려 3만원. 통기타줄의 평균가는 7000원이나, ‘원스’에선 최고의 퀄리티를 보장하는 기타 줄을 쓴다. 기타 줄을 가는 데에만 들어가는 비용이 매주 30만원이다.
뮤지컬 ‘원스’의 ‘골드(Gold)’
뮤지컬 ‘원스’에서 ‘골드(Gold)’
그런 만큼 배우들에겐 단서가 달린다. “가장 좋은 상태를 만들어줄 테니 틀리면 죽는다”는 협박성 쪼임(?)이다.
‘원스’는 오리지널 버전에서 사용하는 악기 브랜드와 종류를 고스란히 따르고 있다. 라이선스 뮤지컬인 만큼 원작 바이블을 준수하는 것은 필수다. 문제는 이제는 단종된 악기도 나온다는 점이다. 서 조감독은 “한국에서 구하지 못하는 악기라 박명성 신시컴퍼니 총프로듀서님이 해외 출장에서 사서 온 악기도 있다”고 했다.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환경일 경우 가장 비슷한 톤과 소리를 내는 악기를 찾아 현지 창작진의 검토 후 구매한다. 서 조감독은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가장 합리적인 가격대로 제작사에 부담이 가지 않는 수준에서 악기를 구매하는 것이었다”며 웃는다.
극중 ‘뱅크 매니저’가 “큰맘 먹고 장만한 우리 아기”라고 자랑하는 고가의 기타는 사실 1000만원이 넘는 제품이었다. 서 조감독은 “딱 한 곡을 부르기 위해 1000만원의 가격을 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해 비슷한 역할을 해주는 비주얼과 사운드를 가진 악기를 10분의 1 가격에 구매했다”고 말했다.
같은 기타로 연주하는 곡일지라도 각각의 곡마다 사용하는 악기가 달라진다. 특히 ‘가이’가 하는 연주에선 “두툼하고 샤프하며 고른 음역대의 마틴 D-28”을 쓴다. 안드레이가 사용하는 에릭 클랩턴 시그니처는 “단정하고 부드럽고 정갈한 소리”를 낸다고 한다.
‘원스’는 다른 무엇도 아닌 음악으로 말하는 뮤지컬이다. 음악이 곧 대사이자 스토리다. 그 음악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무대 뒤에선 ‘모두의 노력’이 긴 시간동안 이어졌다. 서 조감독은 “이 뮤지컬은 만드는 과정부터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수고가 쌓였다”며 “누구 하나 삐긋하면 모든 것이 무너지기에 정교한 프리셋(preset)을 만들어뒀다”고 말했다. 이렇게 매만진 작품 속 음악은 고스란히 위로와 치유가 된다. 그것을 전하기 위해 두 사람의 극진한 보살핌이 있었다.
두 사람은 “‘원스’는 무대 장치, 배우, 음악이 정교하게 짜여져 만든 작품이다”라며 “슬픈 장면은 하나도 없지만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을 쏟아부은 모두의 노력으로 감동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뮤지컬”이라고 입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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