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겸 배우 이정현이 영화 ‘범죄소년’(감독 강이관)을 통해 엄마로 변신했다. 제목만 봐도 범상치 않은 이 작품에서 이정현은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모든 게 허술하지만 13년만에 만난 아들만큼은 지키고 싶어 하는 미혼모로 섬세한 감정 연기를 펼쳤다.
1996년 ‘꽃잎’으로 데뷔한 이정현은 광기 어린 열연으로 관객들의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이어 가요계에도 발을 디딘 그는 수많은 히트곡들을 배출, 한 시대를 풍미하는 테크노 여전사로 자리매김했다. 국내를 점령한 그는 중국시장에 진출했고, 이 때 다소 국내 활동이 뜸해졌었다. 대중들은 이정현의 빈자리에 목말라했다.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그는 지난해 박찬욱 감독의 단편 ‘파란만장’에서 섬뜩한 연기로 조심스레 대중과 만날 채비를 마쳤다.
이후 그는 ‘범죄소년’으로 본격적인 컴백을 알렸다. 상업영화도 아닌, 그렇다고 환영 받을 만한 예쁜 캐릭터도 아닌 미혼모로 컴백했다. 타 여배우라면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이정현였기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항상 이색적인 행보를 걸어왔으므로.
“사실 영화 시나리오가 처음 들어왔을 때 몇 번 거절했어요. 그 때가 연말이라 중국 공연이 너무나 빡빡하게 잡혀 있었거든요. 하지만 감독님을 만나고 나서 마음이 무너졌죠. 감독님이 ‘우리나라의 미혼모 문제는 굉장히 심각하다’면서 다큐멘터리 몇 편을 보여주시더라고요.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지만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 참 많이 울었죠.”
소속사를 설득하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영화를 위해 모든 중국 스케줄을 전면 취소해야 했으며, 노개런티라는 악조건이었기 때문이다.
.“회사를 설득하는 것도 많이 힘들었죠. 회사에서는 상업영화도 아니고, 조건이 좋은 것도 아닌데 이 작품을 굳이 해야겠냐고 말렸죠. 하지만 저는 마음이 가는 작품을 하는 게 되게 중요하거든요. 돈 보고 일하는 것은 정말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를 통해서 미혼모들의 힘든 상황을 조금이나마 알리고 싶었어요.”
어렵게 택할 수 있었던 작품인만큼 이정현의 애정도 컸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미혼모의 현실을 습득한 그는 현장에 투입된 순간부터 효승 그 자체였다.
“촬영 내내 감독님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어요. 아이디어 제공과 캐릭터 설정도 많이 도왔고요. 처음에는 효승이가 어둡고 불쌍한 인물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자살시도도 몇 번 하고 온 인물이라면 다시 아들을 찾은 이상 살려는 의지가 더 강할 거라고 말씀 드렸죠. 다른 감독님들 같았으면 싫어하실 수도 있었는데, 강 감독님은 밝게 웃으시면서 ‘그렇게 가자’고 하시더라고요. 배우의 의견을 잘 들어주시는 분이에요.”
촬영 기간이 짧은 만큼 불철주야 촬영이 이어졌다. 많이 힘들었기에 투정을 부릴 수도 있을 법한데, 그러지 못했다. 이정현은 “내가 어느 새 나이가 먹어서 스태프들을 다독여야 되더라”며 웃어 보였다.
“제가 버티고 있지 않으면 촬영을 할 수가 없었죠. 영주는 너무 어리잖아요.(웃음) 스태프들 다독이는 것도 다 제 몫이었죠.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엄마로 분한 이정현과 그의 아들 지구를 연기한 서영주의 호흡은 흠 잡을 데가 없었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서영주의 자세는 이정현에게 큰 힘이 됐다.
“서로 편한 상태로 호흡을 맞춰야 했죠. 영주가 너무 잘 따라줘서 정말 고마웠어요. 극중 저한테 맞는 신이 있어요. 효승의 감정이 폭발하는 상당히 중요한 신이었죠. 정말 세게 때릴 거니까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했는데 ‘네 누나, 그러세요’라고 태연하게 반응하더라고요.(웃음) 그런데 막상 슛이 들어가고 제 손이 확 날아드니 눈빛이 변하고 표정이 얼어서 대사를 못 하더라고요. 그래서 몇 번 NG가 났는데 계속 때려야 해서 정말 미안했어요.”
실제 작품 밖에서 접한 서영주 또래의 ‘범죄소년’들은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물론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친구들도 있지만 그건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더라고요. 보호자의 유무에 따라 소년원에 가고 안 가고가 정해질 때도 있어요. 소년원 촬영을 할 때 아이들을 멀리서 지켜봤는데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안타깝더라고요. 관객들이 이 아이들에 대한 편견을 많이 버려주셨으면 해요. 또 미혼모들 제도도 너무 약해요. 이들을 보호해주는 시스템이 몇 개월 뿐이 안 되고, 기간이 지나면 그냥 방치되더라고요. 이런 악순환이 가난을 대물림 하게 하고 자살시도를 유발한다고 봐요.”
조심스럽지만 정확히 자신의 소신을 지닌 그이기에 여전히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닐까. 중국에서도 뜨거운 인기몰이 중인 그는 양국을 오가며 바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가요차트나 인기가 금방 변하고 떨어지고 하잖아요. 그런데 중국은 그렇지 않아요. 꾸준히 한 곡을 오랫동안 사랑해 주시더라고요.(웃음) 아직도 제 예전 노래들이 가요 차트에 랭크돼 있어요. 그런 점들에 있어 중국 팬 분들에게 늘 감사하고 있죠. 무대의 스케일도 커서 관객들의 에너지도 많이 느낄 수 있고요.”
현재 국내 가요계는 아이돌 포화상태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고, 하루가 다르게 유행이 바뀐다. 올해 데뷔한 그룹만 해도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다. 이런 세태에 선배가수로서 이정현의 생각은 어떨까.
“요즘은 누가 누군지 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너무 많은 아이돌이 데뷔해서 헷갈리기도 하고요. 그만큼 다양한 색깔과 차별성을 지닌 그룹들이 많이 나왔으면 해요. 본인들이 직접 좋은 아이디어나 콘셉트를 많이 창출해는 것도 인기를 얻는 비결 같아요.”
이번 영화로 오랜만의 복귀를 알린 그는 내년 1월 8일 크랭크인하는 영화 ‘명량-회오리바다’를 차기작으로 선정했다. 국내 활동과 중국 활동에 좀 더 박차를 가하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다.
“‘명량’에서는 차분한 조선시대 여인이기 때문에 여태껏 선보인 신들린 이미지를 확실히 벗을 수 있을 것 같아요.(웃음) 최민식 선배님, 류승룡 선배님과 호흡을 맞춘다는 게 많이 설레기도 하고요. 연기 외에도 내년에는 앨범로도 찾아 뵐 것 같아요. 장르요? 아마 댄스가 될 것 같네요.”
양지원 이슈팀기자 / jwon04@ 사진 황지은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