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하기 힘든 비극과 부조리가 3주째 이어오고 있다. 참담한 심경으로 뉴스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분노와 절망, 슬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간접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온 국민을 쇼크 상태에 빠트린 대형 참사를 극복하기 위해 대중문화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001년 9월 11일, 세계 금융의 심장 뉴욕 맨하튼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에 유나이티드 항공의 여객기 두 대가 날아들었다. 단 한 번도 본토를 침략당한 적 없던 미국인들을 충격과 공포에 몰어넣은 9.11 테러는 미국 드라마(이하 미드)도 변화시켰다. 국내 미드 채널의 배급 및 편성 담당자들은 “9.11 테러 이후 미드는 과거와는 달라진 양상의 국가관과 영웅관을 보여줬다”고 분석했다.

TV가 현대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시대에서 ‘국민적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미드는 정부의 기조에 맞춰 자국민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것을 시작으로 ‘테러의 상처’를 극복해갔다. ‘강한 미국’, ‘올바른 미국’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FOX TV에서 2001년 11월 6일 첫 방송된 ‘24’는 허구의 기관인 ‘대테러진압팀’을 내세워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후보 암살 계획을 막는다는 스토리를 담았다. 그 안에 “테러에 대처하는 미국인들의 방식으로 시작해 비리 등 각종 부조리로부터 정의를 지킨다는 데에 초점을 둔 드라마”라고 미드 채널 스크린의 이충효 팀장은 설명했다.

다른 흐름은 슈퍼히어로가 아닌 소시민의 역할을 강조한 새로운 영웅관의 등장, 테러 이후의 고통에 집중했다는 데에 있다.

박선진 CJ E&M 방송사업부문 영화편성국장은 “9.11 직후 미드는 소재가 상당히 무거워졌다”며 “범죄예방 드라마(‘퍼슨 오브 인터레스트’ 등)이 많이 나왔고, 소방관이나 군인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속속 등장해 그들을 추모하며 새로운 영웅관을 만들어가거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며 9.11을 상기했다”고 전했다.

소방대원의 희생이 많았던 9.11 테러 이후 미드는 사회의 작은 영웅들을 드라마의 중심으로 끌어들였다. 그중에서도 소방대원을주인공으로 삼은 미국 FX 네트웍스의 ‘레스큐 미(2004)’가 인상적이다. 이 드라마는 테러 이후 살아남은 소방관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를 다뤘다. 주인공은 9.11 현장에서 살아남았지만, 사촌과 동료들을 잃고 신경불안으로 고통받았다. 남겨진 자의 삶은 황폐했다. 죽은 사촌의 부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가족과 동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주인공은 상처를 극복하려 애를 쓸수록 인생은 더욱 처참해졌다.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통해 9.11 테러가 가져온 상흔을 정조준한 드라마다.

테러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는 미국인의 자문화 중심주의가 대두됐고 테러 척결을 위해 강한 미국을 강조한 드라마가 많았지만, 2010년대로 접어들며 또 다른 변화가 읽히기 시작했다. 편견과 비난의 대상이었던 아랍계를 비롯한 미국 내 소수민족에 대한 포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2011년 10월 첫 방송된 ‘홈랜드’는 알케에다에서 감금된 미군들이 구출되는 이야기를 담았지만, 사실 주인공은 아랍계 미국인이다. 미국 내에서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드라마는 두 나라의 문화를 겪으며 방황하고 고뇌하는 주인공을 그렸고, 부당한 편견과 공격의 대상이었던 아랍계 사람들을 포용하려는 자세를 유지했다.

‘사람’에 대해 묻는 드라마도 나왔다. 전 세계에 좀비 열풍을 몰고온 미국 AMC의 ‘워킹데드’(2010)와 HBO의 ‘뉴스룸’(2012)이다. 폭스 채널 관계자는 “‘워킹데드’는 묵시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살아남았는데 어떨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인간의 본질을 파헤친다”고 설명했고, 이충효 스크린 팀장은 “‘뉴스룸’은 케이블 뉴스를 만드는 언론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각자의 전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원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드라마다. 전문성에 맞는 본질을 지켜나가는 모습을 영웅이 아닌 생활인의 관점으로 보여주며 미국인들에게 삶의 방향성을 물었다”고 해석했다.

‘공통의 기억’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는 시청자들을 하나로 묶는다. 지난 10년 미국 방송가는 자문화 중심 이미지를 생산하기 위해 드라마를 활용했다. 거기엔 테러 이후 고통의 날을 보내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고, 자부심을 회복시키려는 노력도 담겼다. 미국인들은 이 드라마를 보며 공감하고, 위로 받았으며, 과거의 비극을 잊지 않고 기억했을지 모른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이 야속할 만큼 우리에게도 추스릴 수 없는 고통이 지속되고 있는 때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엔 우리의 드라마에도 또 다른 이야기가 필요해보인다. 믿기 힘든 고통을 치유하고, 이 비극을 드러내 기억할 수 있는 드라마의 필요성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대중에겐 상처와 분노가 공존하고 있다. 드라마는 결국 사람의 정서를 어루만지며 갈 수밖에 없다. 드라마 역시 이후엔 현재의 분위기를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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