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죽음의 계곡 (22)
글 채희문/그림 유현숙
“뭐라고요? 골프 전지훈련을 떠난다고요? 무려 한 달 간이나 미녀 골프선수와 어울려 지낸단 말이지요?”
무심코 지껄이던 한승우의 말에 유한솜은 놀라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 몇 달 전, 대학 입시에 낙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보다 훨씬 충격이 큰 소식이었다. 이를테면 형용할 수 없는 질투가 생겨났다는 말이다.
“아니, 왜 그렇게 놀라지? 회사 업무로 출장을 다녀오는 것뿐인데.”
“오빠는 골프와 아무 상관도 없는데 어째서 전지훈련엘 따라 가냐고요?”
“전략기획실 업무 중의 하나일 뿐이래도?”
유한솜은 한승우와 함께 대학 신춘예술제의 축제마당을 거니는 중이었다. 2년 전이던가? 그녀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잠시 구경한 적이 있던 그 예술제였다. 축제 분위기는 그때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탐스럽게 피어난 장미와 카사블랑카 꽃길이 이어지는 곳마다 생음악이 흐르고, 은하수 전등불 아래에서 어깨를 겹치고 아이스크림을 핥는 젊은 학생들이 넘쳐나곤 했다.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는 군. 불과 2년 사이에 학생들이 훨씬 자유분방해졌어. 저걸 봐, 환한 불빛 아래서도 대놓고 애정표현을 하잖아?”
한승우는 대로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남녀 학생들을 나무라듯 말했다. 사실은 슬쩍 변죽을 울리면서 그녀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와 축제마당에 참석하게 되었지만 바짝 품으로 안겨오는 그녀의 행동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하긴 고등학생 시절인 2년 전에도 어두운 숲길을 지나칠 때마다 그녀는 여러 차례 한승우의 입술을 훔치려 하지 않았던가. 하물며 이제는 고등학생 신분이란 족쇄마저 벗어던졌으니…
“달라진 건 오빠 생각일 뿐이에요. 오빠가 점점 통속적인 보수주의자로 변해가고 있다는 반증일지도 몰라.”
통속적인 보수주의자라고? 한승우는 찔끔했다.
“한솜이, 너부터 변했어.”
“난 변한 거 없어요. 작년까지 선생님이라고 부르다가 지금은 오빠라고 부르는 것이 변한 걸까요? 아니에요, 그건 시간의 흐름에 따른 자연스러운 행동이지요. 난 이제 고삐리가 아니거든요?”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오늘 아침, 젖가슴을 샤워기에 바짝 들이댄 채 거센 물줄기를 맞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세찬 물줄기가 핑크빛 녹두알에 닿을 때마다 야릇한 전율에 몸이 움찔거리는 느낌을 만끽하지 않았던가. 2년이란 세월이 흐른 만큼 성숙해졌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고등학교는 졸업했지만 아직 대학에 들어간 건 아니잖아. 그럴수록 더욱 분발해서 열심히 공부해야지.”
“사랑하면서 공부해도 충분히 대학에 갈 수 있어요.”
“사랑?”
그녀의 대답에 한승우는 더더욱 찔끔했다. 하긴 통속적으로 생각한다면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온 셈이었다. 재벌의 막내딸인 것이 예쁘기까지 하니까… 하지만 그 호박을 덥석 끌어안기는 왠지 거북했다. 짧은 기간이나마 스승과 제자 사이였기 때문일까?
“오빠,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요… 이거, 이것 좀 어떻게 해줘 봐요.”
마침 어두운 숲길, 자그마한 연못을 바라볼 수 있도록 놓인 벤치 앞에 도달했을 때였다. 그녀는 엉거주춤하더니 대뜸 울상부터 짓기 시작했다. 밤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라일락 향기가 코끝을 스치는가 싶더니 가끔씩 찰랑이는 암청색 수면 위로 별빛이 하얗게 부서져 내리던 순간이었다.
“이걸 어째? 브래지어 후크가 풀렸어요. 오빠가 후크 좀 채워줄래요?”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