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회> 죽음의 계곡 2
“국회의원 한 자리 해보시겠다고요?”
“그렇습니다. 내 지은 죄가 아무리 크다지만 3000억원으로 겨우 면죄부 한 장 사고 만다는 게 섭섭하다는 말씀입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상부에 보고 올리겠습니다.”
“그리고요….”
“요구사항이 또 있습니까?”
“아들의 장래에 관한 문제입니다.”
유민 회장은 의자를 끌어당겨 ‘높은 양반’ 앞으로 바짝 다가앉았다. 아무리 수세에 몰려 있긴 했어도 그는 대기업을 이끌어 온 수완가였다. 기회가 찾아왔을 때 놓치지 않고 움켜쥐는 것이야말로 산전수전 겪어 온 지난 세월로부터 터득한 요령이었다. 바로 지금이 그 기회였던 것이다.
“아들을 골프선수로 출세시키려 한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만.”
“차제에 그 녀석의 인생항로를 바꾸려는 것입니다. 이왕 3000억원을 투자해서 밥상을 차릴 바에야 숟가락 하나쯤 더 얹어놓자는 게지요. 제가 아무리 날고 긴들 두 마리 토끼를 쫓을 수야 있겠습니까? 랠리 사업에 올인하면서 아들에게 따로 골프를 시키는 것은 효율성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듣고 보니 그렇군요. 아드님을 PGA에 성공적으로 진출시키려 해도 많은 자금과 노력이 소요되겠지요. 그럼 이번 기회에 아드님을 레이서로 데뷔시키려고요?”
“그렇습니다. 경기에 출전해서 비록 꼴찌를 한다 치더라도 귀중한 경험과 가치를 얻게 되겠지요. 아들이 전면에 나서고, 애비가 뒤에서 밀고… 뭐 그런 맛이라도 있어야 저도 흥이 나질 않겠습니까?”
유민 회장은 이렇게 영역을 확보하며 말뚝을 박기 시작했다. 비록 사업 총괄과 운영관리권은 빼앗겼지만 차제에 유민 제련그룹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는 홍보권이라도 움켜쥐어야 하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 정도야 회장님 소신에 맡기겠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 아들 녀석이 레이서가 되어서 경주차를 모는 전 과정을 언론플레이에 활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십시오. 제 요구사항은 이토록 소박합니다.”
“좋습니다. 그 모든 사항을 A4 용지에 정리, 요약해서 제게 보내주십시오. 상부에 간단한 기획안이라도 올려야 향후 뒷말이 없을 테니까요.”
런런런 SPC 주식회사 출범을 빙자한 ‘높은 양반’과의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비록 국회의원 자리와 랠리사업의 홍보권은 차지했지만 3000억원에 대한 대가로는 미미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에 속이 쓰렸다. 그나마 거성자동차로부터 10%에 해당하는 300억원을 협찬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나 할까?
“이봐요, 비서실장! 우리 회사 스포츠마케팅팀은 오늘부로 당장 해산시키세요. 파견되었던 직원들은 모두 제자리로 복귀시키고 빈 방은 회의실로 바꿔요. 아니, 이왕이면 자동차 경주 자료실로 꾸며보도록 해요.”
유민 회장은 집무실로 들어서자마자 이렇게 명령했다. 그러나 아무리 회장이라 해도 실행 가능한 일이 있고 불가능한 일이 있는 법, 1층 위에 2층, 2층 위에 3층, 3층 위에 옥상이 있는 것처럼 유민 회장 위에 신희영이라는 왕회장이 있다는 것을 전 직원은 심정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명령은 아무에게도 먹혀들지 않았다.
“회장님, 곧 기자들이 들이닥칠 모양입니다. 사모님께서 저희 회사 골프팀 창단에 따른 기자회견을 자청하셨거든요?”
비서실장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사모님 명령이니 알아서 기라는 표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