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앙겔라 메르켈 독일총리가 석양이 지기도 전에 평범한 주부의 모습으로 단골 마트에 들려 장을 보는 모습이 보도된 적이 있다. 당시 EU는 난민, 그리스 사태, IS창궐 등 굵직한 현안으로 긴장감이 매우 고조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페이스북 CEO 마크 주커버그도 지난해 말 육아휴직을 낸 후 기저귀를 가는 평범한 아빠의 모습을 언론에 공개했다.
국내에서는 아잉헬 오도노휴 주한아일랜드 대사가 공식석상에 남편 피터 불렌(Peter Bullen)을 대동하기로 유명하다. 피터는 촉망받는 공인회계사(CPA)였지만 아내를 위해 과감히 이직했다.
한국에서 4년간 근무를 마치고 다음달 귀임하는 에바 불테즈(Ewa Bultez) 벨기에 상무관도 남편이 내내 동행했으며, 주한독일대사관 롤프 슈스터(Rolf Schuster) 독일 부대사 역시 어린 자녀가 태어나자 일가정 양립을 위해 임기를 남긴 채 휴직하고 최근 귀국하기도 했다.
유럽의 주한 외교관과 그 배우자들은 가족을 위해 휴직이나 이직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 선진국에선 남성 육아휴직 같은 일-가정 양립 제도를 일찌감치 도입해 근로자들이 핵가족 시대에도 안심하고 자녀를 돌보며 계속 생업에 종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가정 양립은 서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도요타는 이달 초 일주일 중 하루 2시간만 출근하고 나머지는 가정과 거래처에서 일할 수 있도록 근무 시스템을 바꾼다고 한다. 도요타가 올해 예상 매출액 7%, 순수익 35% 감소 등 동일본 대지진 이후 최대폭의 부진을 직접 발표한지 보름여 만에 나온 후속조치라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더욱 주목된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2001년 OECD 초저출산 기준인 1.30명보다 낮은 1.29명으로 떨어진 이래 지난해 1.24명 수준까지 떨어져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지난 2014년 총취업자 수는 53만3000명인데 같은 해 출생자 수는 43만5000명에 불과하다. 국방부는 병력 부족을 이유로 이공계ㆍ산업체 병역특례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우리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당정이 모여 일-가정 양립을 위한 전환형 시간선택제, 남성육아휴직, 대체근무제 등 저출산 대책을 수립하고 경제단체와 협력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저출산 문제와 일가정 양립에 대한 기업들의 반응은 아직 미지근하다. 17개월 연속 수출이 감소하고 주력산업은 경쟁력 약화로 당장 구조조정에 직면해 있다. 기업들은 매출과 수익이 줄어들고 청년실업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는 마당에 저출산 문제는 먼 미래의 일이고 남의 얘기처럼 들린다.
그러나 일-가정 양립에 앞장서는 곳이 독일, 미국, 일본의 총리, CEO, 글로벌 기업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우리가 항상 부러워하고 배우고자 하는 국가와 기업들이 아니던가.
기업에 목표를 할당하고 의무를 지우는 방식으로는 저출산 문제와 일-가정 양립 문제가 절대 해결될 수 없다. 기업 스스로 일-가정 양립 문제를 기업의 생존전략 차원에서 고민하지 않으면 답이 없다.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삶의 방식, 생산방식, 경제의 패러다임이 급격히 바뀌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노동과 자본의 양적 투입만으로는 디지털 경제, 플랫폼 경제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기업 CEO의 생각이 바뀌고 기업문화가 변하지 않으면 저출산 문제 해결도 기업의 생존도 어렵다. 따라서 일-가정 양립의 문제를 국가 어젠더가 아닌 기업의 생존전략으로 바라봐야 한다.
우리 기업과 공공기관에선 여전히 가정이나 개인의 형편이 후순위로 밀리고 멸사봉공, 분골쇄신과 같은 희생의 각오를 모범적인 직장인의 당연한 자세와 미덕으로 여긴다. 그러나 기보에 있는 바둑으로는 알파고를 이길 수 없듯 수직적이고 획일적인 조직문화가 창의적이고 다양한 생각과 삶의 방식을 장려하는 기업문화로 바뀌지 않으면 기업도 국가도 미래가 없다. 최근 삼성 등 국내기업들이 탄력근무제를 도입하고 호칭을 바꾸는 등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니 반가운 소식이다. 우리 기업들도 일-가정 양립을 통한 기업문화 혁신을 적극 검토해야 할 때다.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igiza77@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