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남다른 영화사랑
양복에 운동화 차림. 언뜻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은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 내정자의 ‘트레이드 마크’다. 얼마나 전국 방방곡곡과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지, 매일 시간 단위로 쪼개진 일정을 소화하는 그에게 발 편한 운동화는 필수다. “발에 땀 나게 돌아다닌다”는 말은 정확히 김 내정자를 위한 말이다.
1937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61년 문화공보부 7급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문화공보부 문화국장, 보도국장, 국제교류국장, 기획관리실장 등을 거쳐 1988년부터 4년간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1992년 문화부 차관으로 임명되고 이듬해에는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30년이 넘는 공직생활을 마치고 60대에 접어들었던 김 내정자의 삶은 전환점을 맞았다. 1995년이었다. 1992년 이탈리아 페사로 영화제에 다녀왔던 당시 경성대 영화과 이용관 교수, 전양준 영화평론가, 부산예술문화대 영화과 김지석 교수 세 명이 김 내정자를 찾아와 “부산에서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한 것.
영화진흥공사 사장일 때 해외 영화제를 방문하고서 “자국 영화를 해외에 소개하려면 영화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김 내정자는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젊은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일 벌리다 가산탕진하고 패가망신한다”는 주위의 걱정도 소용없었다. 그렇게 그는 1996년 초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그의 인생이 모퉁이를 돈 순간이었다.
영화제는 1회부터 대성공이었다. 2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이 들었고, 아시아 감독들은 앞다투어 영화제에서 작품을 소개하고 싶어 했다. 김 내정자는 각국 영화제를 순회하며 “좋은 것은 다 벤치마킹했다.”
그 중 젊은 감독의 프로젝트를 선정해 제작자ㆍ투자자와 연결해주는 장인 PPP(부산 프로모션 플랜)를 3회부터 개최해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자파르 파니히 감독(이란)의 ‘써클’도,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한 왕 샤오슈아이(중국) 감독의 ‘북경자전거’도 ‘PPP 출신’이다. ‘아시아 영화의 허브’라는 부산국제영화제의 모토가 자리 잡았다.
김 내정자는 행정가 시절부터 “답은 현장에 있다”는 철학을 갖고 일했다. 영화진흥공사 사장일 때는 발로 뛰며 영화인들을 만났다. 영화인들의 숙원이던 남양주 종합촬영소를 설립했다. 가장 최근에는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하며 몇달 동안 매일같이 광역시, 전국의 문화소외지역, 콘텐츠업계를 순서대로 돌면서 의견을 청취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매월 마지막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이다. 한국 나이 여든인 김 내정자에게는 여전한 ‘파워’가 느껴진다. 원동력이 무엇이냐 묻자 한 마디로 압축했다. “오기로요.”(웃음)
“우리 나이로 팔십 들어서까지 이렇게 왕성하게 현직에서 활동한다는 게, 나처럼 행복한 사람은 아마 없을 거에요. 제가 맡은 일에 항상 온 힘을 다해 왔기 때문에 지금까지 오게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죠.”
알고 보면 김 내정자는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다. 2012년 안성기, 강수연 주연의 단편영화 ‘주리’를 연출했다. 다섯 명의 영화제 심사위원이 영화를 선정하면서 벌어지는 갈등을 담은 작품이다. 김 내정자의 영화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겼다.
“영화 만드는 건 욕심이 있었어요. 단편 한 편 정도를 더 만들고, 내년쯤엔 장편영화에 도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조직위원장 자리를 맡게 됐어요. 다시 미뤄진 꿈이 됐어요.”
김동호 내정자에게 ‘영화’란? 정답식으로 말하면 “모든 분야의 예술인들이 협업해서 만들어 놓은 하나의 결정체”란다. 하지만 역시 사전적 정의보다는 김 내정자의 인생에서 우러나온 현답이 흥미롭다. “영화라는 건 내 인생을 바꿔놓은 하나의 이정표랄까. 저는 행정가에서 영화인이 된 거죠.”
이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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