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상 사회부장

몇년전 지방으로 내려갔던 친한 판사 친구와 소줏잔을 기울인 적 있다. 그가 털어놓은 얘기는 놀라웠다. 지방으로 가자마자 지역의 한 기업인으로부터 계속 전화가 오더란다. 괜히 오해살 짓을 할 필요가 없다 싶어, 만남을 계속 거절했다. 우연히 한 식당에서 그를 만났는데, 어느새 밥값을 계산하고 촌지 봉투 하나를 건네고 휑하니 사라지더란다. 밥값과 적잖은 금액의 봉투를 돌려주느라 애를 먹었다는 게 친구의 말이다.

지난 2004년 도입된 향판(鄕判ㆍ지역법관)제를 둘러싸고 온갖 비판이 뒤따르고 있다.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을 둘러싼 ‘황제 노역’ 잡음의 후폭풍이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논란을 재차 촉발한 ‘황제 노역’의 근본 원인이 지역토착 세력과 판사들의 밀착이라는 시각이 향판에 대한 곱잖은 시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노역의 판결 당사자인 장병우 광주지방법원장은 곧장 사표를 냈지만, 대법원이 사표 수리를 보류하고 감찰 조사를 벌이기로 하면서 사건은 새국면으로 돌입하고 있다. 대법원의 감찰 착수는 장 법원장이 ‘일당 5억원’ 판결의 수혜자인 허 전 회장과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느냐는 의혹이 출발점이다. 허 전 회장 측에 제기된 각종 의혹은 법원이 밝혀내야 할 일이지만, 국민의 싸늘한 시선은 좀처럼 거둬지지 않고 있다.

향판은 원하는 판사들에 대해 서울을 제외한 대전ㆍ대구ㆍ광주ㆍ부산고등법원 관할 안에 있는 법원에서만 보직을 바꿔주는 시스템이다. 잦은 인사이동을 줄여 재판 효율성을 높이고, 판사들의 주거생활 안정에 도움될 것이라는 취지로 도입됐다. 한 지역에서 오래 근무하면 해당 지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 합리적인 재판이 가능하다는 점도 반영됐다.

물론 이같은 선의의 취지에도 불구하고 지역 토착세력과의 유착이 횡행할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잡음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우려가 이번 황제 노역 사건에서 터진 것이다.

하늘 아래 이상적인 제도는 없다. 향판제도 역시 긍정적인 측면, 부정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문제는 이를 운용하는 사람의 문제다. 제도가 아무리 좋다한들, 청렴하지 않은 인물이 끼어 있다면 그 제도는 무용지물이다.

요즘 기자는 드라마 ‘참 좋은 시절’을 즐겨본다. 가난한 소년이 검사가 돼 15년만에 고향 경주로 돌아와 가족간에 부대끼는 게 스토리다. 줄거리 중 하나가 강동석(이서진 분) 검사가 지역 기업인인 오치수(고인범 분)의 비리를 캐는 것이다. 오치수가 강동석을 만나려 줄을 대는 모습과 이를 뿌리치는 강동석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강 검사 역시 법조인이라는 점에서 법원에서도 ‘제2 강동석’이 많아지면 향판제도의 허점은 금세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선진화개혁추진회의는 향판제도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대한민국 헌법을 비롯해 지금 우리 국민들이 진정으로 지키고자 하는 법은 바로 ‘황제 노역’을 양산하는 법도 아니고, 특정인에 대한 ‘관대한 법’도 아닌 ‘보통사람’들이 모두 다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그런 법과 엄격한 집행이라는 것을 법조계는 분명히 상기해야 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더불어 향판제도 폐지에 대한 격론보다, 제2 강동석 판사를 양산할 근원적 처방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김영상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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