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장면1. 1988년 스물한 살 성보라가 방에 쳐박혀 공부를 하다가 창문을 열고 담배를 핀다. 입으로 도너츠를 서너개 만든다. 방에 들어온 막내동생 노을은 화들짝 놀라며 ‘방에서 뭐하는 거냐’고 한다.
#장면2. 2015년 마흔아홉 성보라는 동생 집에 놀러와 담배를 핀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온다. 영상통화다. 중년이 된 성보라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동생 덕선이 먹고 있는 아이스크림에 비벼 끈다.
지난 9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응답하라 1988’(tvN) 속 흡연장면을 심의했다. 앞서 지난달 21일 방영분이 특히나 문제였다.
소위원회에서는 ‘응답하라 1988’에 대해 만장일치로 행정지도인 ‘권고’ 처분을 내렸다. 오후 10시까지로 설정된 청소년 보호시간대에 모자이크 처리 없이 흡연장면이 방송된 것이 심의를 위반했다고 봤다. 방송심의기준 제28조(건전한 생활기품)에선 “방송은 건전한 시민정신과 생활기풍의 조성에 힘써야 한다”며 흡연 등의 내용을 다룰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금, 토요일 오후 8시 방송되는 ‘응팔’은 이번 시즌에서 따뜻한 가족드라마를 표방, 전작들과 달리 시간대를 앞당겨 안방을 찾고 있다.
제작진은 이에 대해 “학생운동을 하던 성보라의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장치였다”며 “앞으로 주의하겠다”는 입장이다.
‘응팔’에서 류혜영이 연기하는 성보라는 소위 쌍문동 ‘미친개’로 불리는 과격하고 성질 사나운 여대생이다. 5공화국 끝자락에 대학생이 돼 학생운동의 현장에 뛰어든 민주화 운동 세대로, 제작진은 이 같은 캐릭터를 보충설명하기 위한 연출의 한 장치였다는 설명이다.
당시 방송 이후 온라인과 시청자게시판에는 실제로 흡연 장면을 문제 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가족이 함께 보는 시간대인데, 아이들의 정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반응이었다. ‘응팔’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소위원회 안건으로 상정된 것도 민원이 접수됐기 때문이다.
‘응답하라 1988’의 경우 흡연 장면이 유난히 많긴 하다. 심지어 극중 고등학교 2학년생, 18세로 설정된 최택(박보검)이 대회를 앞두고 긴장을 풀기 위해 담패를 피는 장면도 나왔다. 방송심의규정에선 ‘어린이와 청소년이 흡연, 음주하는 장면을 묘사하여서는 아니되며 내용 전개상 불가피한 경우에도 그 표현에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고 나와있다.
요즘 드라마에선 흡연 장면이 등장하는 일은 거의 없다. 지상파에 비해 케이블채널의 표현과 규제가 자유롭다 할지라도 ‘응팔’의 경우 이 같은 장면은 거의 매회 등장한다. 시청자들에게 유달리 눈에 띄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상파 드라마에서 흡연장면이 사라진 건 2000년대 초반이었다. 그 이전까진 수도 없이 노출됐다. 한국소비자연맹은 1998년 9월부터 1999년 5월 10일까지 방송 3사를 통해 방영된 31편의 드라마를 분석했을 정도다. 당시 자료를 살펴보면 박근형은 ‘올해의 최다 흡연 탤런트’로 선정됐다. 총 43번 드라마 안에서 담배를 태웠다. 그 뒤는 이종원, 이세창이 각각 22회로 이름을 올렸다.
숱하게 노출해왔던 흡연 장면이 지상파에서 2000년대 초반 사회적인 금연 분위기와 맞물려 자취를 감추게 됐다. 지상파 방송3사가 자발적으로 흡연 장면을 내보내지 않았다. 심의규정은 강제성이 아닌 “신중해야 한다”는 잣대를 적용했을 뿐이지만, 방송사에선 미디어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력을 먼저 고려했다.
지상파 방송사의 고위관계자는 “방송사가 가진 책무의 하나다. 공적인 역할에 이바지해야 하고,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쳐야한다는 가치 때문이었다”며 “2000년대 초반 사회 분위기도 있었고, 미디어를 통해 흡연 장면의 노출이 잦을 경우 청소년들이 따라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음주 장면은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
영화에선 훨씬 자유롭다. 음주, 흡연 장면이 숱하게 노출된다. 지난해 정민수 동덕여대 교수가 한국보건교육건강증진학회지에 게재한 ‘영화속 흡연 장면에 대한 탐색적 연구’에 따르면 한국에서 제작한 영화의 흡연장면 비율이 다른 나라의 영화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2000년부터 2013년까지 국내에서 개봉한 영화 중 500만 명 이상 관람한 흥행영화 51편을 분석한 결과, 흡연장면이 한번이라도 등장한 영화는 32편이었다. 이 중 한국영화의 비율이 78.1%로 미국영화(15.6%)의 5배 수준에 달했다.
현재 영화의 사정도 예전과는 다르다. 지난달 12일 열린 ’담배규제기본협약(FTCT) 10주년 담배규제 정책포럼‘에서 김상희 복지부 건강정책국장은 “영화에서 많은 흡연 장면이 나와 (청소년들이) 노출되고 있다”며 “이 부분을 규제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법제화를 통한 규제 방식이 아닌 “국민적 공감대 확산을 통해 규제”라는 설명이다.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모으고 있는 드라마가 정작 권고 조치를 받고 나자 시청자들은 “의도를 가지고 연출한 장면을 흡연을 이유호 심의한다는 것이 구시대적”이라며 “음주, 흡연이 권장할 만한 기호는 아닐 지라도 이미 영화에서 무방비로 노출되는데 제재까지 가할 사안이냐”는 반응도 나온다. 제작관계자들 사이에선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반응도 나온다.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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