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배두헌 기자] “자소서 첨삭 받고 왔는데 다 갈아 엎으래요. 학과 공부하기도 바빴는데 무슨 극복 사례와 리더십 발휘 경험을 쓰라는지. 이놈의 자소설….”
여느 대졸 취업준비생의 한탄처럼 들리지만 이는 수시 모집 지원을 앞둔 고3 수험생의 말이다.
대학 수시모집에서 자기소개서를 중요하게 보는 ‘학생부종합전형’의 비율이 계속 늘면서 고3 수험생도 취업난 속 청년들 만큼이나 ‘자소설’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고교생들이 주로 이용하는 한 대입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자소서에 대한 고민하고 또 한탄하는 수험생들의 글이 하루에도 수백건씩 올라올 정도다.
평가 취지는 좋지만 공교육에 자소서 지도를 온전히 믿고 맡길 수 없는 현실에서 결국 수험생과 학부모가 사교육 시장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2016 수시 모집 요강’에 따르면 올해 전체 수시모집 가운데 자소서가 핵심적 평가 요소 중 하나인 학생부종합평가(옛 입학사정관제)의 정원 비중은 27.9%로 지난해보다 3.5% 포인트 늘었다.
반면 학교 내신 성적이 절대적 요소를 차지하는 학생부교과전형의 모집 비중은 57.3%로 전년대비 2.7%포인트 줄어들었다.
교육 당국의 정책 기조상 자소서가 중요한 학생부종합전형은 앞으로 더 비율이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대학을 졸업한 20대 중후반 청년들조차 힘겨워하는 자소서를 청소년들이 혼자서 잘 써낼 수 있겠냐는 점이다.
최근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취업준비생 665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자소서에 거짓을 쓴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82.9%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10명 중 8명 이상이 ‘자소서’가 아닌 ‘자소설’을 쓴 것이다.
‘자소서를 다른 사람이 대신 써준 적 있냐’는 질문에는 20.9%의 응답자가 ‘그렇다’고 답했다. 5명 중 1명은 심지어 ‘자소서 대필’을 받은 경험이 있단 것이다.
물론 기업이 청년들에게 요구하는 자소서와 대학이 수험생에게 요구하는 자소서는 다르다. 하지만 지원자가 느끼는 자소서에 대한 압박감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쓸 내용이 더 없는’ 고교생이 더욱 스트레스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사설 업체에 의존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입 자소서 시장’은 블루오션이 됐다. 수십~수백만원짜리 자소서 ‘대필’ 컨설팅에도 강남 엄마들이 줄을 선다.
자소서에 시달리는 청소년은 고3 수험생 뿐만이 아니다. 외고ㆍ과고 등 특목고나 자사고에 입학하려는 중학생도 자소서를 준비하고, 국제중에 입학하려면 초등학생도 자소서를 써야한다.
전문가들은 자소서 평가의 좋은 취지를 인정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양정호 성균관대 교육학과 교수는 “고교 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진로를 고민해보는 등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혼자 자소서를 쓰기엔 벅찬 게 사실”이라면서 “교사들의 지도가 절실한데 아직까진 공교육의 역량이 크게 부족한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양 교수는 “고3 담임 교사의 상당수는 학생들 자소서를 지도해줄 시간과 경험 모두가 부족하다”며 “공립고의 경우 신임 교사나 기간제 교사가 고3 담임을 맡기도 하는데, 학부모들한테 사교육에 의존하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쓸 얘기가 없어 ‘자소설’이 될 수밖에 없는 건 튀지 말고 학과 공부에 충실하라는 문화 속에 자라온 취업준비생이나 고3 수험생이나 똑같다”면서 “취업이든 대입이든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보니 사교육 의존 심화 등 역기능이 나타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badhoney@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