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슬기 기자]“물 나오는 기계를 돈 내고 사는 바보가 어디 있나?” 1980년대 후반 정수기가 국내에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앞다퉈 정수기의 ‘종말’을 예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마다 생수통을 들고 약수터에서 물을 떠 오거나 수돗물에 보리차를 넣고 끓여 마시는 일이 ‘일상’이었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정수기는 말 그대로 ‘사치품’일 뿐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88올림픽 이후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정수기의 위상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환경오염의 가속화로 ‘약수터 물도 믿을 게 못 된다’ ‘수돗물에서 중금속이 검출됐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고, 정수기를 찾는 사람도 덩달아 늘어났다. 시장이 성장할 기미를 보이자 정수기 제조에 뛰어드는 중소기업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른바 ‘규모의 경제’가 갖춰지기 시작한 셈이다.
1990년대 후반 당시 방문 교육 서비스로 유명했던 웅진(현 코웨이)이 국내 정수기 시장에 렌털 개념을 도입, 100만~200만원을 호가하던 정수기의 구매 부담을 대폭 낮추면서 정수기는 어느 새 ‘필수 가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미 수십년이 지난 ‘정수기의 역사’를 굳이 끄집어낸 것은 최근 미세먼지로 촉발된 공기ㆍ청결 산업의 발전 양상이 정수기 산업의 그것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 국내 관련 산업의 개화를 이끌었던 공기청정기는 2004년과 2008년 잇단 ‘오존 발생’ 논란을 겪으며 많은 부침을 겪었다.
그러나 최근 황사를 넘어선 중국발 미세먼지의 위협이 현실화되면서 공기청정기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는 분위기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인식 전환의 시간이 정수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리, 그리고 더 넓게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정수기는 현재의 시장규모에 이르기까지 약 15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지만, 공기청정기는 최근 미세먼지 바람을 타고 2개월 만에 급속히 가정 보급률을 늘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세먼지로 촉발된 관련 산업의 성장은 공기청정기 같은 가전에만 머무르지 않고 마스크나 의약품, 미역ㆍ삼겹살 등의 식품,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세먼지 자체가 하나의 특화된 쇼핑 카테고리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미세먼지에 ‘공기청정기’ 웃다=지난달 21일부터 28일까지 8일간 전국을 공습했던 미세먼지의 수혜를 가장 톡톡히 본 것은 단연 공기청정기 업계다. 이 시기 공기청정기는 업계의 전통적인 ‘비수기’로 꼽히는 1~2월임에도 판매량이 크게 늘어났다. 롯데하이마트는 올 1월과 2월 공기청정기 판매량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650%, 1000%씩 증가했다. 특히 지난해 11월부터 올 2월까지는 매달 판매량이 전월 대비 평균 80%씩 늘었다.
이런 현상은 백화점에서도 똑같이 발생했다. 롯데백화점은 공기청정기 판매량이 1월에는 전년 동기보다 110% 증가했고, 2월에는 230%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백화점에서도 2월 공기청정기 매출이 전년 동기보다 171% 증가했다.
미세먼지로 인해 실내환기 자체가 불가능해진 가운데, 가족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으로 공기청정기를 선택하는 주부들이 늘어나면서 공기청정기가 ‘벼락 인기’를 끌게 된 것.
실제 의학계에서는 “미세먼지를 방지하기 위해 실내 환기를 하지 않는 일은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집안에서 음식을 조리할 때 연기가 나거나 음식이 타게 되면 휘발성 유기화합물 등의 유해물질이 발생, 집안의 미세먼지 농도가 바깥보다 높아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결국 집 안팎을 미세먼지가 둘러싸는 셈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바깥 공기가 나쁘더라도 가끔은 환기를 하는 동시에 실내 공기의 유해성분을 여과해 줄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근의 공기청정기 구매 트렌드는 특히 ‘무균실(clean room)’의 공조에 널리 사용되는 고성능 헤파필터 탑재 제품에 집중되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고성능 공기청정기가 채택하고 있는 ‘H13’ 헤파필터는 0.3마이크로미터 크기의 초미세먼지까지 걸러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공기청정기능에 자연가습 기능을 더한 ‘올인원’ 형태의 제품도 인기다.
자연가습 기능은 젖은 옷이 건조되며 실내 습도가 올라가는 원리를 응용한 기술로, 호흡기가 건조해지면서 미세먼지를 배출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미세먼지 주의보가 있는 날이면 코웨이 등 주요 회사에는 공기청정기 제품에 대한 문의가 평소보다 20~30% 늘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미세먼지 사태 초기에는 ‘실외에서만 조심하면 된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점차 실내 미세먼지 농도 조절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수요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삼겹살도 불티…미세먼지 나비효과?=미세먼지로 인한 공기청정기의 판매량 증가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결과지만, 전혀 뜻하지 않게 ‘미세먼지 효과’를 본 곳도 있다.
양돈 농가가 그 주인공. 이마트에 따르면 미세먼지 농도가 300㎍/㎥ 이상으로 평소 농도(50㎍/㎥)보다 6~7배 이상 치솟았던 지난달 14~27일 삼겹살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8.3% 늘어났다. 돼지고기의 지방이 입과 기관지에 붙은 먼지를 씻어준다는 속설이 매출 증가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의학계에 따르면 돼지고기 지방이 미세먼지에 미치는 역할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혀진 바가 없다.
지난 2007년 한국식품연구원이 작업 중 중금속 등의 유해물질 흡입 가능성이 큰 근로자 58명에게 6주간 돼지고기를 제공한 결과, 이들의 혈중 납 농도와 카드뮴 농도가 각각 2%, 9% 감소했다는 연구결과가 있긴 하지만, 이것만으로 돼지고기와 미세먼지 중금속과의 상관관계를 단언하기는 어렵다는 것.
오히려 “지방함량이 높은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섭취하면 지용성 유해물질의 체내 흡수율이 증가한다는 연구결과가 있어 소비자의 주의가 필요하다”고 의학계 관계자는 말했다.
오히려 수용성 섬유질인 알긴산을 풍부히 함유, 미세먼지나 황사 속에 포함된 중금속 배출을 돕는 미역 등의 해조류나 예로부터 진해ㆍ거담작용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도라지 등을 섭취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한편 미세먼지 사태 속에서 아이를 가진 엄마들은 청결유지를 위한 손 세정제 구매에도 열을 올렸다.
생활용품 전문 기업 CJLION에 따르면 항균 브랜드 ‘아이! 깨끗해’의 거품비누 매출은 미세먼지가 극심했던 지난달 19~25일 동안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3.2% 올랐다. 미세먼지로 인한 질병을 걱정하는 주부들이 아이들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 것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3월 들어 미세먼지가 잠시 주춤하는 양상을 보이고는 있지만, 곧 다시 시작될 황사 등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관련 시장의 성장세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