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 인연’정기인 명예교수가 본 내 친구 한광옥은
내가 한광옥을 처음 만난 것은 1960년 4월1일이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 1학년 입학 때였다. 모두 남학생 17명과 여학생 3명이었다.
남학생 중 유독 키가 훤칠하고 미남 얼굴에 환한 미소를 품은 사나이가 눈에 띄었다. 한광옥과 나는 이렇게 만났다. 그 후 55년이 지났다. 나는 고엽제환자라 술을 입에 대지 않는데 두주불사하는 한광옥과 가까운 것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많다.
1960년 4월19일 영시(英詩) 수업시간에 선배들이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러 경무대로 가자고 불러냈다. 학생들은 수십 미터 쯤 되는 6열의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한광옥은 용감하게도 맨 앞줄로 우리들을 끌고 갔다. 맨 앞줄이라 무술경관의 곤봉을 무수히 맞았지만 경무대 앞까지 갔다. 갑자기 총소리가 나며 학생들이 쓰러졌다. 모두가 흩어졌다. 나와 한광옥, 둘은 경무대 근처 구멍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경찰들의 수색이 시작됐다. 나는 2층 창을 넘어 뒷길로 도망쳤다. 그러나 한광옥은 “죄지은 것처럼 도망치고 싶지 않다”며 그대로 버티다가 결국 마포형무소에 끌려가 이틀간 수감됐다고 했다.
이후 우리의 운명은 바뀌었다. 그는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결국 제명됐다. 나는 졸업 뒤 해병대 보병중위로 월남전에 참전한 후 고엽제로 사경을 헤매면서 약 10여년간은 두절된 채 지냈다. 1980년 초 내가 한양대학교 교수가 되고 한광옥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영문과 동기들이 함께 만났다.
정치가 한광옥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넓은 가슴에 ‘창조적 욕망’을 품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정치에서 창조는 결백, 의리, 대의명분, 자기희생 등 순수함에서 나온다. 이 때문에 그는 눈앞의 이익보다 손해를 감수해 왔다. 지금도 그는 남북통일과 동서지역 화해, 계층갈등 해소라는 막막한 과제를 창조적 미래로 여기고 있다.
친구로서 정말 놀란 일이 있다. 부인 정영자 여사가 폐암 말기로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일 때다. 그는 단 하루도 부인 곁을 떠나지 않은 채 꼬박 2년간을 ‘밀착’ 간호했다. 그 많은 정치 동지들이 불러내도 응하지 않았다. 그 덕에 부인은 완치에 가까운 결정을 받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요즘 재발했다고 한다. 그는 국민대통합위원장이지만 저녁 식사는 공적인 사무나 약속, 그리고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부인과 함께 하고 있다. 그의 인간다운 순애보에 박수를 힘껏 보내며 부인의 완쾌와 보람찬 미래가 창조되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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