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심신 치유·나만의 자아찾기… 출근 안하는 것에 만족하는 휴가는 옛말 기업들 집중휴가제·연중 상시휴가 등 도입 ‘창조경제’ 시류속 휴가문화도 눈부신 진화
광고회사에 다니는 30대 초반의 여성 장모 씨는 올여름 휴가를 스페인으로 떠난다. 프랑스에서 스페인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산티아고 순례길’을 직접 걸어보기 위해서다.
총 800㎞의 거리를 완주하기 위해 장 씨는 여름휴가에 연차휴가와 리프레시 휴가 등을 붙여 8월 한 달을 통째로 휴가에 사용하기로 했다. 이전 같았으면 엄두도 못 냈을 테지만, 지난해부터 회사가 ‘최대 한 달까지 자유롭게 충분히 쉬라’는 방향으로 휴가체제를 개편하면서 장 씨도 ‘대장정’을 떠나겠다는 맘을 먹었다.
장 씨는 “몸은 고되겠지만 숨 쉴 틈 없는 서울을 떠나 걷는 것만으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힐링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이번 경험이 앞으로 일을 하는 데도 자산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의 휴가문화가 변하고 있다. 무더위를 피해 ‘출근 안 하는 것에 위안을 삼는’ 뻔한 휴가 대신 심신을 치유하고 영감을 얻는 진짜 휴가를 즐기려는 직장인들이 늘었다.
변화의 바람은 제도의 변화에서 시작됐다. 연중휴가제도, 집중휴가제도 등 다양한 휴가제도를 도입하는 기업들이 늘면서다.
LG디스플레이의 경우 직원들에게 최소 1주일에서 4주까지의 장기휴가를 강력하게 권장한다. 필요한 만큼 휴가를 쓰도록 몇 해 전부터 시행하고 있지만, 실제 사용률이 떨어진다는 판단하에 지난해부터는 거의 의무적으로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연차를 소진하게 하고 있다. ‘일과 삶이 균형잡힌 근로 문화를 만들자’는 LG그룹 차원의 드라이브가 더해지면서 3~4주씩 휴가를 가는 사람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상황이다.
GS칼텍스와 GS건설 등도 연차휴가를 붙여 2주 이상 최장 2개월까지 여름휴가를 갈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특히 GS칼텍스는 팀장급이 최소 2주간 휴가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인사팀에 사유서를 제출하게 한다. 윗사람이 나서지 않으면 부하직원들이 제대로 휴가를 쓸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GS칼텍스 직원의 70% 이상이 장기 휴가를 사용하고 있다.
연중 원하는 때에 휴가를 가거나 여름휴가를 6월과 9월에 사용하는 회사원들도 많아졌다. 9월 휴가 예찬론자인 모 그룹사 과장은 “성수기를 피할 경우 비용 측면에서 매력적이고, 무덥지 않은 날씨에 진짜 힐링하는 휴가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라면서 “휴가 성수기인 7월 말 8월 초에는 회사 업무도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편이라 9월에 휴가 가는 것이 여러 면에서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휴가기간의 증가는 자연스레 휴가의 ‘알맹이’도 변화시키고 있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미혼의 직장인들을 중심으로 의미를 남기는 휴가가 늘어나는 추세다. 최근 들어서는 템플스테이를 하거나, 인적이 드문 섬에서 캠핑을 하며 ‘자아를 찾는’ 패턴의 휴가가 많아졌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박물관을 향하는 제품 디자이너, 사막횡단 마라톤에 도전하는 의류업체 직원, 부르고뉴 지방의 와이너리를 순회하며 와인지식을 쌓는 영업맨 등 해외에서 영감, 업무에 필요한 지식, 새로운 아이디어를 을 얻으려는 사람도 많다.
휴가문화의 변화는 변하는 시대의 반영이기도 하다. ‘창조경제’와 ‘혁신’ 바람이 강박적일 정도로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는 상황에서 휴가는 개인과 조직에 새로운 숙제가 된다. ‘어떻게 쉬느냐’, ‘얼마나 자유롭게 쉬느냐’의 문제는 이제 개인과 조직의 창의성과 자율성, 가능성과 생산성 등을 보여주는 잣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30대 중반의 전자회사 모 과장은 작년 휴가 기간 내내 집에만 있었지만 회사 동료들에겐 고향인 전북지역의 맛집을 순회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는 “선후배들이 국내외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고 와서 기획회의 등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발제하는데, 사흘 동안 집에만 있었다고 말하긴 창피해서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면서 “나는 휴가 마이너리티”라고 말했다. 마냥 생각없이 쉬기만 하는 건 직장인들에게 더 이상 자랑거리가 아니다.
기업들에도 마찬가지다. 형편이 좋은 기업, 경쟁력이 높은 기업, 창의적인 기업들일수록 더 많이 쉬는 듯한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시대가 됐다. 소비자들이나 구직자들에게 그 회사의 휴가 문화는 회사를 인식하는 하나의 단서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관광연구원이 최근 직장인 300명을 표본조사한 결과, 종사자 300인 이상 기업은 연차휴가로 18일을 부여했지만, 50인 미만의 기업은 13.1일로 5일 정도의 차이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형편이 좋은 회사일수록 더 쉬었다는 의미다.
홍승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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