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박수진 기자]한 분야에 종사하며 오랜 경험과 공로를 쌓은 사람을 우리 사회는 ‘원로(元老)’라 부른다. 세인들이 문용린 서울시교육감을 부를 때 가장 흔히 사용하는 수식어도 ‘원로’다. 1967년 서울대 교육학과에 입학하며 시작된 교육 인생만 44년이니 어쩌면 당연한 수식어일지 모른다.
서울시교육감 취임 100일을 앞두고 문 교육감을 직접 만나 보니 또 하나의 좋은 수식어가 떠올랐다. 바로 ‘장인(匠人)’이다. 오랜 연륜과 기술을 바탕으로 하나의 피사체를 다양한 모습으로 깎고 다듬어 예술로 승화시키는 장인처럼 그는 교수로, 장관으로, 또 교육감으로 수십년간 다양한 역할을 맡으며 대한민국 교육을 다듬어 발전시키고 있다.
장인의 기술이 농익을수록 손은 거칠어지기 마련이다. 문 교육감도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적잖은 풍랑을 마주했다. 전임 교육감 두 명이 실형을 선고 받으며 좌초하던 ‘서울교육 호’에 승선하기까지도 많은 고민과 쉽지 않은 과정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현재 대한민국 교육의 중심에 서 있다. 아이들의 꿈과 끼를 살리는 ‘행복 교육’을 구현하기 위한 장인의 노력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교수→교육부 장관→서울시교육감’…한 평생, 교육에 몸바치다=그의 교육 경력은 화려하다. 일단 굵직한 것만 따져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서울대와 미국 미네소타대학교에서 교육심리학으로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1989년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로 본격적인 교육인의 삶을 시작한다. 2000년에는 1월부터 7월까지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고 이후 다시 학자의 삶을 살다가 2012년 서울시교육감 재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청소년폭력예방재단 이사장, 독서새물결운동추진위원회 위원장, 한국교육학회 회장 등의 경력과 교육 관련 저서 30여권을 더하면 그를 왜 교육계의 원로라 부르는지 알 수 있다.
문 교육감은 이 많은 경력이 사실은 하나의 길로 통한다고 말한다.
“교육부장관, 교육감, 교수 등 제가 걸어온 모든 길은 우리나라 교육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일입니다. 바람직한 교육 정책의 방향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서 같은 입장이죠.”
물론 차이점도 있다. 문 교육감은 “교수로 있을 때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에 관심이 갔던 것이 사실입니다. 교육부 장관과 교육감도 차이는 있어요. 교육감은 실제로 학교 교육현장에 바로 적용할 정책을 세워 추진하고 실행하는 자리이다보니 조금 더 실천적인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지난 해 12월 서울시교육감으로 당선됐을 당시 세간에서는 ‘학자 출신이라 학교 현장을 잘 알지 못한다’는 우려도 있었다. 문 교육감 본인도 이 사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그래서 더 열심히 뛰었다. 집무실에 머물기 보다는 가능한 한 학교 현장을 직접 보고 교사와 학생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3월 새학기가 시작한 후 한달 동안 8곳의 학교를 방문했다. 학생, 학부모, 교사와 함께 학교 현장의 애로사항을 직접 전해 듣기도 하고 학교폭력 문제 해결방법을 같이 논의하기도 했다. ‘교육감 방문이 학교에 부담을 준다’는 일부 의견도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학교에서 한 선생님을 뵀는데 교사 생활 20년 만에 교육감을 처음 봤다고 하더군요. ‘어떻게 20년 간 교직생활을 하며 교육감을 한 번도 못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좀 의아했습니다. 이제까지 교육감의 현장성이 좀 부족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취임 100일, 서울 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다=오는 29일로 그는 취임 100일을 맞는다. 곽노현 전 교육감의 실형 선고로 인한 공백으로 재선거가 치러졌고 문 교육감이 당선됐다. 일반적인 선거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책 준비 등의 시간도 없이 당선 다음날 바로 업무가 시작됐다. 임기도 1년 6개월로 내년 2014년6월까지다. ‘식물 교육감’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지난 100일 동안 서울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임 교육감 두 명이 연속으로 실형 선고를 받고, 학생인권조례 등을 둘러싼 교육계 내 보혁갈등으로 혼란이 계속되던 서울 교육에 ‘진로ㆍ적성교육’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한 셈이다.
박근혜 정부의 ‘자유학기제’와 맞물리며 시너지를 발휘했고 중학교 1학년의 중간고사를 폐지하고 진로교육을 강화한다는 다소 획기적인 정책을 이어가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는 서울 내 11개 학교를 ‘중1진로탐색 집중학년제’ 연구학교로 지정해 시범 운영하며 정책의 현장성을 점검하고 있다.
문 교육감은 “아이들의 꿈과 끼를 강조하면 공부는 재미 있어집니다. 김연아 선수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어요. 김 선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간다는 꿈을 꾸는 대신 피겨스케이팅 분야의 최고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꿨고 이를 이루기 위해 매진했습니다. 자신의 꿈과 끼를 찾아 노력하니 세계선수권 1위라는 쾌거를 달성하고 인생의 행복을 찾은 거죠. 우리 아이들도 그런 꿈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제가 바라는 서울교육의 모습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아들 진로 교육하며 얻은 깨달음…정책의 밑거름 되다=문 교육감이 아이들의 진로와 적성 교육을 강조하게 된 배경에는 부모로서 자녀의 진로교육을 하며 실제로 겪었던 갈등도 영향을 미쳤다.
“막내 아들이 중학교 1학년 때 나한테 체육선생님이 되겠다고 했어요. 중학교 체육선생님을 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당시에 나는 ‘체육을 전공해서 대학 교수가 되라’고 했었죠. 별로 귀담아 듣지 않고 넘어갔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문ㆍ이과를 선택할 때 다시 말을 꺼내더라고요. 나는 ‘아직도 체육선생이냐’라고 물었는데 아들이 대뜸 ‘아빠는 내 말을 어떻게 들었나. 난 중학교 때부터 체육 선생님이 꿈이었다’고 진지하게 말하더군요. 아들은 내가 자신의 의견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는 생각에 좀 속이 상했더라고요. ‘아빠는 나를 인정한 게 아니다’라고 하기도 하고. 그 후에도 몇 번 의견갈등이 있었지만 결국 아들의 꿈을 인정하기로 했죠.” 실제로 문 교육감의 아들은 현재 대학에서 체육을 전공하고 있다.
문 교육감은 교수시절부터 지금까지 학부모를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면 아들과의 일화를 털어 놓으며 ‘부모의 욕심으로 아이의 행복을 재단하지 마라’고 당부한다. 자녀의 행복을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지만 그 과정에서 간혹 부모의 욕심이 아이의 행복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들을 보면서 나는 ‘체육을 해서 행복해질 수 있겠나’라는 걱정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부모들 마음 속에 ‘내 자녀가 판검사가 돼야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있었잖아요. 하지만 그게 아니더군요. 부모는 아이를 믿고 아이가 행복해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줘야 합니다. 부모가 생각하는대로 끌어당기려해선 안 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 중에서도 학습속도가 가장 빠른 게 무엇인지 관심을 갖는 것이 자녀 교육의 첫번째 입니다.”
▶“주눅든 교사의 어깨를 펴주는 것이 학교 회복의 우선 순위”=문 교육감은 부모의 역할 만큼이나 교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해왔다. 교육감 선거 당시에도 교권 회복을 강조했고 취임 이후에도 교원의 사기 진작을 위한 다양한 제도를 시행 중에 있다. 그 배경에는 학생들의 진로적성 교육을 이끌어가는 것은 물론 학교폭력 등 학교 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우선 주체가 교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 적성 발견에서도 교사의 역할은 부모보다 중요합니다. 사실 학부모는 내 아이니까 아이가 음악 좋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하죠. 아이가 노래를 부르면 내 자식이니 무조건 잘한다고 보기 쉽습니다. 하지만 교사는 그렇지 않아요. 여러 아이들과 비교해보고 객관적으로 소질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학교폭력 문제도 마찬가지라는 게 문 교육감의 설명이다. “학교폭력은 징표가 있습니다. 피해 학생의 얼굴은 슬프고 우울할 수 밖에 없어요. 교사가 아이의 얼굴 표정을 유심히 살피고 감정 변화를 관심있게 지켜보는 것이 학교폭력 예방의 첫걸음입니다. ‘맞고 있는 장면을 찍기 위해’ 설치하는 폐쇄회로(CC)TV로는 할 수 없는 일이죠.”
문 교육감이 중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행복출석부’도 같은 맥락이다. 학생들에게 미리 ‘우울하다’ㆍ ‘두렵다’ㆍ ‘슬프다’ㆍ‘기쁘다’ㆍ ‘신난다’ㆍ‘짜증난다’ 등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 42개가 적힌 리스트를 나눠주고, 아침에 교사가 출석을 부르면 “네. 저는 22번(우울하다)입니다”라고 답한다. 교사가 학생의 감정을 파악하고 고민 등을 미리 발견해 학교폭력을 예방하자는 것이다.
그는 이를 위해 교사의 사기 진작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눅든 교사의 어깨를 펴주고, 교사들이 신이 나 일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무너진 교실을 회복하는 전제조건이라는 이야기다.
문 교육감은 “과거에 비해 수당도 올랐고 업무 경감도 이뤄졌다. 하지만 교사들이 느끼는 현실의 열악함은 더욱 악화됐고 사기도 더 떨어졌다. 교사가 아니면 대한민국 교육은 살려낼 방안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교사에게 힘을 실어주고 신나게 교육에 몰두하게 만들지가 남은 임기 동안의 핵심 과제”라고 말했다. 실제로 문 교육감은 오는 스승의날에 교사들을 위한 힐링콘서트를 기획하는 등 다양한 교사 사기 진작 방안을 고민 중이다.
교육자로서 그의 목표는 늘 같다. 교육의 기본을 세우 것이다. “교육의 기본을 세우고 무너진 교실을 회복하는 것이 저의 꿈이자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 학생이 자신의 꿈과 끼를 찾아서 행복감을 느끼는 가운데 자신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고, 교사는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가르칠 수 있도록 교권을 확립하는 데 힘을 쏟을 것입니다.”
수십년 동안 대한민국 교육을 지켜온 장인의 꿈은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소박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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