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5구의 여인
영화 ‘파리 5구의 여인’(감독 파벨 파블리코스키)은 일단 작가 더글러스 케네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라는 데 눈이 가는 작품이다.
더글러스 케네디는 ‘빅 픽처’와 ‘템테이션’으로 유명한 미국의 스타 작가다. ‘빅 픽처’는 로펌의 변호사로 여유롭고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던 남자가 아내의 불륜을 의심하다 살인을 저지르면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도면밀한 계획을 실행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템테이션’은 오랜 무명 생활 끝에 할리우드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가 된 주인공이 더 큰 성공을 탐하다가 음모에 휘말려 최악의 상황을 맞은 후, 재기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두 편 모두 빠르고 흡인력 있는 전개와 반전을 거듭하는 구성, 할리우드나 미국 미디어업계의 이면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 등으로 대중소설로서 큰 성공을 거뒀다.
영화 ‘파리 5구의 여인’에서 더글러스 케네디는 자신이 선호하는 주 재료인 불륜과 스캔들, 위기의 부부생활, 중산층 남자가 가진 성공에 대한 강박, 몰락에 대한 공포 등을 다시 한 번 요리한다.
소설가이자 대학교수인 미국인 톰 릭스(이단 호크 분)가 가족을 찾아 파리에 도착하지만 아내는 그를 매몰차게 내치고 딸과의 만남마저 금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톰이 교수 재직 당시 제자와의 스캔들로 학교에서 추방당했으며, 아내와 딸에 대한 접근금지명령을 받게 됐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갈 곳 없이 된 톰 릭스는 무작정 올라탄 파리의 버스에서 짐과 소지품을 모두 도둑맞게 되고 불법 이민자들이 사는 누추한 호텔에 간신히 거처를 마련한다. 호텔 주인의 도움으로 한 건물의 야간 경비 자리를 얻게 되지만, 옆 방에선 수상한 소동과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는 우연히 수수께끼의 중년 여성 마르짓(크리스틴 스콧 토마스 분)을 만나 서로를 탐닉하는 관계가 된다. 그녀가 바로 ‘파리 5구의 여인’. 한때 누군가의 ‘뮤즈’(남성작가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여성)였다는 마르짓과 소설가로서 성공에 대한 야망을 가진 톰의 만남이 계속되는 동안, 톰을 둘러싼 주변에서 죽음과 괴이한 사건들이 이어진다. 톰은 경찰 수사 과정에서 ‘파리 5구의 여인’에 대한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된다.
미국을 무대로 한 더글러스 케네디의 다른 소설들이 똑 떨어지는 명징한 퍼즐게임으로 진행되는 반면, 파리 배경의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이번 영화에선 뿌연 안개처럼 몽환적인 불안과 공포, 환영이 불길하고 음울하게 떠돈다. 파리는 예술과 낭만의 도시가 아니라 이방인들의 몰락한 삶이 어둠 속으로 잦아들고, 범죄와 가까운 불법 이민자들이 뒷골목에 몸을 숨기는 회색빛의 도시다. 기대와 달리 할리우드 장르영화보다는 유럽 예술영화에 더 가까운 정조와 분위기를 띤 이 작품에서 ‘예술적 성공’이란 악령에게 영혼을 판 대가로 주어지는 무엇이다. 폴란드 출신 영국 감독 파벨 파블리코스키는 성공과 몰락에 대한 중산층의 자괴감과 예술가의 숙명에 대한 비극적 자의식을 전에 느끼지 못했던 파리의 공기 속에 담아냈다. 유약하고 불안한 눈빛의 이단 호크와 마녀 같은 매혹을 지닌 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연기도 볼 만하다. 25일 개봉.
이형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