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제천] 11살의 어린 순조가 조선 제 23대 임금이 되자 증조할아버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했다. 1800년 7월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으며 뒤주에 갇혀죽은 사도세자의 손자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굶어죽는데에는 그를 몹시 미워한 정순왕후가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정순왕후는 15살때 66세 영조의 계비가 됐다. 조정에서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시하는 벽파(僻派)와 동정하는 진보 성향의 시파(時派)로 첨예대결했다. 선왕 정조는 남인(南人) 중심의 시파를 조정에 많이 등용했다. 때문에 정순왕후를 비롯한 벽파 인사들이 상대적으로 밀려났다.

이 시파에는 당시 청나라에서 서양문물을 공부하고 온 실학자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고 이들 중 조선에 갓 태동한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정조가 재위하던 18세기 중후반 이승훈 채제공을 위시, 천주교 신도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1만명에 달했다고도 한다. 이들은 제사를 거부하고 평등사상과 유일신을 신봉, 군신관계를 근간으로 하는 성리학, 유교사상의 조선사회에 정면 도전했다. 정조는 곧 수그러들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수렴청정 정순왕후는 벽파 인재를 등용하고 남인들을 축출하는 정치보복을 단행한다. 순조가 등극한 이듬해(1801년) 언문교지를 내려 반대파인 천주교도 박해 작업에 나섰다. 이때 동원된 것이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으로 다섯집씩 묶어 서로 감시, 100명의 순교자를 냈고 정약용과 형 정약전 등 400명이 유배를 떠났다. 박지원 박제가도 관직에서 쫓겨났다. 한국 천주교에 대대적으로 가해진 첫번째 탄압, 신유박해(辛酉迫害)다.

이때 박해를 피해 27살 천재 황사영(黃嗣永)이 상주 차림으로 서울 사는 이씨(李氏)로 위장하고 몰래 충북 제천 박달재 고갯길을 넘어 산 속 도점촌으로 숨어 들어온다.

황사영은 16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할 정도로 천재였다. 아직 어린나이여서 벼슬을 할 수 없자 정조가 아까워하며 4년 후 벼슬자리를 약속했다고 한다. 그 사이,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딸과 결혼하면서 천주교에 입문했다. 그는 1795년 최초의 외국인 신부 중국인 저우원모(周文謨)에게 교리를 배웠다.

박해를 피해 도점촌으로 들어온 황사영은 이곳에서 옹기 굽던 신자 김귀동의 집 뒤뜰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에 은신했다. 총 8개월간 이 토굴에서 생활하는데 처음 몇 달간 그는 지인들을 통해 전국의 박해상황을 상세히 정보수집했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 충주장에서 비단을 사오게 했다. 세상을 발칵 뒤집은 ‘황사영 백서’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황사영은 가로 62cm, 세로 38cm 크기의 명주천에 천주교도 박해 상황과 구원 요청을 적은 글을 빼곡하게 써내려 갔다. 그 작은 명주에 붓으로 무려 1만3384자를 한자로 썼다. 붓글씨가 펜촉글씨 같이 작았다. 황사영은 조선에 교회를 재건하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베이징 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박해상황과 구원내용을 전달하려 했었다.

8개월에 걸쳐 은둔하며 만든 백서를 황심 등 인편을 통해 베이징 동지사(冬至使)에 끼어 주교에게 보내려다 의금부에 발각돼 백서를 압수당하고 황사영 역시 9월29일 체포됐다.

그런데 백서에서 크나큰 문제가 터졌다. 당시 순교 내용과 황사영이 주교에게 제시한 5가지 구원 내용이 종교를 위해 조국까지 배반하는 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첫째, 조선 교회에 대한 재정적 도움 요청이었다.

둘째, 조선 교회와 베이징 교회가 서로 쉽게 연락할 수 있도록 가게를 설립하자는 것.

셋째,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이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하라는 것.

넷째, 청나라 황제에게 말해 조선을 닝구타(寧古塔 영고탑ㆍ청나라 발상지 헤이룽장성의 한 지명)에 소속시킨 뒤 친왕으로 하여금 조선을 보호 감독케 하고 조선왕을 부마(駙馬ㆍ임금의 사위)로 삼자는 것.

다섯째, 서양의 선박과 군사, 무기를 얻어와 조선에 출정한 뒤 국왕에게 글을 보내 선교사를 수용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종교를 위해 조선을 청에 편입시키자는 내용과 서양 군대를 조국인 조선에 출정케 하자는 내용은 한 신도가 작성한 글이었지만 큰 파장을 불러왔다. 박해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해도 이 글은 두고두고 비판의 대상이 됐었다.

이 백서로 인해 황사영은 그해 11월5일 서울 서대문 밖에서 대역부도죄로 능지처참 당하고 가족들은 유배를 떠나면서 이 문제는 일단락된다.

이에 앞서 5월 중국인 신부 저우원모도 자수해 순교하게 되는데 조선 정부가 청나라 사람을 죽여 한때 전전긍긍해 하기도 했다.

종교가 없는 필자는 그동안 전국 여행을 하면서 사찰기행이 많았다. 그러던 중 마침 천주교를 접할 기회를 맞았다. 충북 제천시 배론성지다. 4월 20일, 하순으로 접어드는데 중부내륙고속도로에 갑자기 눈이 쏟아졌다. 목적지 신림IC를 눈 앞에 두고 때늦은 눈 구경을 위해 치악휴게소에서 쉬어갔다. 한겨울 눈 보다 더 반가웠다.

배론성지(舟論聖地)는 이곳 계곡 지형이 배 모양을 닮았다 해서 붙여졌다. 지금은 박달재와 이곳으로 진입하는 길이 좋아졌지만 당시엔 숨어살면 찾기 어려운 지형이었다.

천주교 성지는 국내에 여러곳에 있지만 배론성지는 황사영 백서 토굴과 최양업 신부의 묘, 국내 최초 신학교가 세워진 곳이라는데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천주교도이자 이곳에서 해설을 해주시는 김명숙 선생님이 성지를 함께 거닐며 설명해 주셨다. 가물어도 마른 적이 없다는 작은 하천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성지가 소박하게 조성돼 있었다.

먼저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 성 요셉 신학교로 발길을 옮겼다. 이곳에 살던 신도 장주기(요셉)의 초가를 빌려 1855년 설립했다. 책임자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푸르티에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였다. 하지만 11년 후 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1866년)로 신학교는 문을 닫고 두 신부와 학생들은 순교했다.

이 신학교 건물은 지난 1950년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았는데 2003년 다시 초가로 복원하면서 10m 옆으로 옮겨 지었다. 원래 자리엔 신학당터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초가 왼쪽 사잇길로 들어가면 황사영의 토굴이 있다. 산비탈 좁은 공간에 흙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사람 예닐곱명이 허리 굽히고 들어가면 꽉 찰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붓으로 깨알 만큼 작게 글씨를 썼다. 지금 여기엔 백서 사본이 전시돼 있고 원본은 의금부 창고에 쌓여있다 발견돼 바티칸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보내져 보관하고 있다.

이 토굴을 돌아서 앞으로 나오니 황사영 동상이 있었다. 이 동상은 황사영 후손인 재일교포가 북한에서 만들어 기증했다고 하는데 옷주름을 잘 보면 북한의 동상 기법을 그대로 살려 김일성 동상과 유사했다.

‘순교자들의 집’ 앞 하천을 건너 작은 언덕을 오르면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이 있다. 둥근 모습의 이 공원 광장으로 최양업 신부는 우리나라 두번째 사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신부의 묘도 이 성지에 있다. 또래 김대건 신부와 함께 마카오로 신학 유학을 다녀왔다. 박해와 검문으로 인해 입국을 못하다 만주를 통해 십 수년이 걸려 들어왔다. 1861년 경상도에서 전교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경에서 선종했다. 때문에 순교자는 아니다. 신학교가 있는 이곳에 묻히면서 배론성지가 또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조각공원에는 최 신부의 일대기가 전시돼 있는데 무엇보다도 어머니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최 신부를 비롯 여섯 아들을 둔 어머니(이성례ㆍ마리아)는 남편이 순교하고 자신도 감옥에 갇히는데 막내 두살배기 아들에게 먹일 젖이 안나와 아이가 굶어죽게 된다. 어머니는 몽둥이, 꼬챙이 온갖 고문은 다 견딜 수 있지만 품 안의 자식의 죽음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배교하고 만다. 배교를 하면 밖에 나와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양업이 마카오로 떠난 후 아들을 유학보낸 어머니로서 다시 잡혀간다. 하지만 아들들을 면회오지 못하게 하고 순교하는데 이때 최양업 신부는 사람을 보내 어머니가 한번에 운명할 수 있게 목을 벨 칼을 잘 갈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 조각공원 아래쪽엔 배 모양의 거대한 성당이 눈길을 끈다. ‘바다의 별 성당’이라고 부른다. 김 선생님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봤다. 토요일 오전 큰 성당 안에는 아직 사람이 없었고 한쪽 작은 예배당에서는 예배 보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특이한 것은 십자가였다. 보통 나무십자가지만 이곳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였다. 예수님의 왼쪽(좌도)에는 예수를 조롱한 사람이 목이 잘린 채로, 오른쪽(우도)에는 ‘나는 죄를 지었지만 저 사람은 죄가 없다’ 하고 죽은 사람이 편안한 모습으로 매달린 조각을 했다.

성당 안 작은 공간 벽에는 최양업 신부가 쓴 천주가사(天主歌辭) 21편이 전시돼 있는데 오늘날 쓰지않는 한글이 있어 눈길을 끌었다. 최양업 김대건 등 신부들의 초상화와 고해소까지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김 선생님은 이 배론성지는 천주교 신도들의 성지순례는 물론이고 종교와 관계없이 편하게 산책하듯 찾는 관광객들이 많다고 했다. 공기 좋은 곳, 주변 경치도 좋아서라고 했다.

배론성지로의 여행, 필자 입장에서는 하나의 종교가 새로운 곳에서 뿌리를 내리기까지 겪는 역경이 어떤 것인가 하는 걸 느끼게 한 여행이었다. 또 하나, 이제 또다른 종교지를 여행했다는데 대한 개인적인 안도감도 솔직히 조금은 있었다.

글ㆍ사진=남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