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박일한 기자] 얼마 전 캄보디아 프놈펜이 갔을 때 일입니다. 한국 업체가 현지에서 미니신도시 수준인 1만7600가구 규모의 주택사업을 착공하는 현장이었는데요. 사업비만 수조원 규모의 캄보디아 역사상 최대 주택사업어서 현지 언론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행사 직전 발표된 자료에는 준공시점, 투자금액 등 기본적인 정보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기자설명회에선 당연히 그 질문부터 나왔죠. 그런데 답변이 뜻밖이었습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아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지역엔 변수가 많아 구체적인 계획을 짤 수 없네요.”
이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정도 규모의 사업은 기업의 명운을 가를 수 있기 때문에 무척 신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업에 참여하는 기업은 사업 일정에 따른 자금 흐름, 자재조달 방법, 리스크 요인 등을 세밀히 분석해 수익성을 따지고 사업 여부를 결정합니다. 위험요인을 최대한 고려한 몇 단계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기도 하죠. 당연히 투자금액, 준공시점 등 구체적인 계획을 짜지 않으면 사업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사업 시점이 몇 년 지연되고, 계획이 조금만 틀어져도 기업 입장에서는 수익성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형 프로젝트가 아직도 투자금액이나 준공시점 등을 정하지 않았다는 건 상식과는 너무 동떨어진 겁니다.
담당 임원은 사정을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캄보디아는 아직 주택법 등 관련법 조차 마련되지 않았어요. 제도가 미비 돼 있어 우리가 정부를 설득하고 움직여서 중장기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계획을 아무리 세밀하게 세워봤자 그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요. 지금으로선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뢰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본= 저명한 정치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쓴 ‘트러스트’란 책이 생각났습니다. 이 책은 한 사회에서 ‘신뢰’야 말로 부를 창출하는 가장 중요한 사회적 자본이라고 말합니다. 사회가 발전하려면 약속의 체계로써 법과 제도가 마련돼 이를 모두가 잘 지킬 것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상대방이 서로 약속한 것을 이행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분업과 협동이 가능하고 이런 것이 사회 발전의 밑거름이 된다고 보는 거죠. 정부가 약속을 했으면 반드시 이행하고, 국민이 이를 믿고 각자 역할을 다하는 ‘고신뢰’의 사회가 ‘선진국’이라는 겁니다.
반대로 후진국의 특징인 ‘저신뢰’의 사회에 사는 국민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도적 기반을 마련해 놓지 않았고, 정부조차 신뢰할 수 없으니아무도 약속을 이행할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겁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업활동은 무척 힘들 겁니다. 약속을 하긴 했지만 지켜질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하고, 고위 공직자 한두명의 마음에 따라 계획이 틀어진다면 누가 정상적으로 일을 하려 들겠습니까! 이런 나라에서 공무원 뇌물사건과 비리가 일상적인 것은 이 때문일 겁니다.
▶한국사회에 확산되는 저신뢰 문화= 요즘 한국사회에 확산되는 ‘저신뢰’ 문화가 우려스러운 건 이 때문입니다. 검찰과 국정원 등 신뢰를 먹고 사는 정부 조직은 무슨 이해집단처럼 비춰지고 있고, 국회는 이권싸움에만 집중하는 집단으로 보이며, 정부가 발표하는 대책은 믿지 못할 공염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갑니다.
이야기를 좁혀서 부동산 정책만 따져도 그림은 또렷하게 그려집니다.
6월 말 종료되는 취득세 감면 혜택에 대해 정부는 연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지만 시장에서는 ‘설마~ 다시 감면해 줄 수밖에 없을 걸...’하며 콧방귀를 뀌고 있습니다. 강남의 한 중개업자는 “주택시장이 계속 침체되면 결국 정부가 또 다시 추가대책을 내놓지 않겠냐?”고 반문했습니다.
오래 갈 것도 없이 당장 이명박 정부 때만 떠올려 보세요. 정부는 줄 곧 더 ‘이상 부동산 추가 대책은 없다, 이번 대책으로 시장이 안정될 것이다’고 했지만 몇 개월도 안 돼 추가 대책이 나오길 반복했습니다. 수십번의 부동산 정책이 쏟아졌죠.
정부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자 정부 발표와 반대로 움직이면 성공한다는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정부는 조금 억울할 수 있습니다.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많은 정책들이 국회에서 입법과정을 거치면서 번번이 좌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분양가상한제 폐지와 다주택자 양도세 중과 폐지는 2009년부터 매번 정부 추진 규제완화 계획에 포함됐지만 국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되지 못하면서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회가 정부 불신 조장?= 주택시장 침체를 막기 위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부동산 정책에 국회가 제동을 거는 건 박근혜 정부에 들어서도 더 본격화하는 것 같습니다. 당장 4.1부동산 대책에서부터 시작입니다.
4.1부동산 대책 가운데 리모델링 수직증축, 목돈 안드는 전세제도, 정비사업 조합원의 2주택 소유 허용 등을 담은 관련법이 모두 6월 국회 회기 내 처리가 불발로 끝났다고 하네요.
물론 국회에서는 관련법을 심의하면서 문제가 있으면 통과시키지 않을 수 있고, 수정안을 다시 내놓으라고 정부 등 발의자에 요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통과가 지연된 대부분의 법안이 그 자체로는 여야가 이견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국정원 대선개입, NLL 논란, 철도산업발전방안(철도 민영화 논란) 등 부동산 관련법과 상관없는 사안으로 여야가 충돌하면서 이런 민생 법안이 묻히거나 통과가 지연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사이 부동산 시장은 다시 침체가 시작되고 ‘거래절벽’이 현실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부동산 시장은 요즘 일주일 단위로 냉탕과 온탕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금방 회복될 것같이 매물이 사라지고 거래가 늘다가도 곧 다시 급매물이 나오고 매수문의가 사라집니다. 청약자가 거의 없고 미분양이 늘어나 분양시장의 침체가 시작됐나 싶더니 어떤 단지엔 400가구 모집하는데 1순위에서만 1만명이 넘는 청약자가 몰립니다.
정부와 국회가 신뢰를 잃고 시장 참여자가 갈 길을 잃고 헤매니 시장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모습입니다.
▶시장 회복위해 신뢰 회복 필수=어떤 사회건 ‘저신뢰’ 문화가 확산되면 경제적인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동산처럼 정부 정책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시장에 신뢰가 사라지면 매매심리는 더 위축되고 침체의 골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는 제발 “더 이상 *** 대책은 없다”, “시장은 곧 살아날 것이다” 같은 책임지지 못할 말은 삼갔으면 합니다. 차라리 “시장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모니터링 집중적으로 하고 있다. 좀 더 지켜보겠다”는 태도가 바람직합니다.
무엇보다 대책 발표는 관련부처와 여야가 미리 합의한 후 내놓아야 합니다. 정부가 대책만 내놓고 ‘이젠 우리는 모르겠다. 국회에 달렸다.’는 식으로 접근해서 안됩니다. 대책발표부터 시행까지 신속히 처리될 수 있도록 미리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제발 정부가 신뢰를 되찾아 시장이 믿고 따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반복하건대 신뢰야 말로 부를 창출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적 자본이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