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진단 기술 · 제품 개발 13년 외길 ‘동시다중유전자검사기술’ 차세대 세계 일류상품으로…천종윤 씨젠 대표가 말하는 그의 삶 그의 길…
아버지 사업실패·결핵 등 학창시절 시련 딛고 23세 농대 입학…미생물학·분자생물학으로 전공 바꿔 혈혈단신 美유학길
달랑 한학기 등록금만 들고 6년만에 박사학위…치열한 독학 통해 홀로 서는 힘 터득 “난 죽기 살기로 해야하는 독종스타일”
주변사람이 없다면 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양질의 의학정보 제공으로 미력하나마 세상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보람된 일
“어느 누구도 탓하려고 하지 마라” 내 인생인데 누구 핑계를 댄다고 일이 다시 좋아지진 않아.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변함 없을 것
사람이 한 평생을 살다보면 죽을 고비를 한두 차례 겪게 마련이다. 그때의 트라우마가 이후 삶의 철학을 결정할 만큼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천종윤(57) 씨젠 대표도 학창시절의 경험이 지금의 삶을 오롯이 지배하고 있다. 어쩌면 천성적으로 타고난 깡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에 맞선 배짱에서 지금의 씨젠을 끌고 온 힘을 발견하게 된다. 극단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다시 맞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사고는 늘 자신을 낮추는 겸손으로 그에게 체화돼 있었다.
주변인에게도 개인적인 얘기를 쉽게 하지 않는 그가 처음으로 헤럴드경제 휴먼다큐 코너에서 결코 순탄치 않았던 개인적인 삶과 따뜻한 가족얘기, 평범하지 않은 사업과 경영철학에 대해 막힘없이 쏟아냈다.
석촌호수가 가을햇살에 눈부신 10월의 어느날 송파구 방이동 본사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천 대표의 열정을 듣기에 3시간도 부족했다.
▶깡으로 버틴 학창시절=중학교를 다닐 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면서 가세가 갑작스레 기울었다. 학생회비를 내지 않은 학생을 집으로 돌려보낼 때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지 못한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어렵게 고등학교에 진학은 했지만,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결핵이라는 병마와 싸워야 했다. 학업을 지속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2학년에 중퇴했다.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도 여의치 않았다. 고등학교는 마쳐야겠다는 생각에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과외나 학원은 고사하고 중고책방을 돌며 교재를 마련했다.
가끔 당시 일기를 꺼내본다는 천 대표는 “어린 나이지만 참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다. 애늙은이가 따로 없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잘 먹고 잘 자야 낫는 병이 결핵인데, 그럴 형편이 안되자 오히려 독기가 올랐다. 집에서 혼자 지내는 자신을 스스로 다잡아야 했다. 강가 얼음을 깨고 들어가기도 하고, 요양차 찾은 경북 청도 운문사 계곡물에 몸을 담그면서 자신을 채찍질했다.
그렇게 21세가 되던 해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큰 어려움 없이 학업에만 전념하던 친구에 비하면 힘든 학창시절이었다.
▶학업과 사업에 눈뜨다=결핵은 5년이나 지나서야 완치됐다. 폐가 석회화하면서 굳어져 지금도 무리한 운동은 피해야 하는 상황이다. 검정고시를 통과해 23세에 건국대 농과대학에 입학했지만, 한 학기를 다니고 도저히 수업을 못 받겠다 싶었다. 철학에 막연한 동경이 있었지만, 그 꿈은 접어야 했다.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나이도, 경제적 여유도 없었다. 1년 휴학에 군대 3년, 유학준비 1년을 보내고 나서야 1987년 비로소 도미할 수 있었다.
미국 테네시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시작한 그는 전공을 바꿔 미생물학과 분자생물학을 전공했다. 달랑 한 학기 등록금만 들고 태평양을 건넌 그는 먼저 와 있던 한국 유학생 친구의 소개로 실험실 보조연구원으로 장학금과 생활비를 지원받으며 학업에 매진했다.
농학과 전혀 다른 분야를 시작한 천 대표를 받아준 연구실 교수는 처음엔 혀를 찼다고 한다. 사실상 백지상태였던 그는 기본 용어에서부터 하나씩 배워야 했다. 그렇게 힘들게 3년을 보냈는데, 논문 주제가 학문적으로 의미없다는 날벼락 같은 통보를 받았다. 그 참에 아예 박사 과정을 밟게 된 그는 새로운 주제로 논문을 준비했고, 도미 6년 만인 1993년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하바드대학에서 연구원으로 박사후 과정을 거쳤고, 이후에는 지도교수를 따라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연구원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외국생활을 하면서도 가슴 한 편에는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고 있었다.
1995년 금호생명환경과학연구소에서 연구원 자리를 제안했다. 이어 광주과학기술원 겸임교수로도 재직했다.
그는 “아내가 미국생활을 싫어해 한국에서 집문제만 해결되면 귀국할 생각을 하던 참에 제안을 받고 바로 귀국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2000년부터는 이화여대에서 강의를 하면서 사업구상을 현실로 옮기기 시작했다.
▶“친구 만나고 술 먹을 시간 어딨습니까?”=경북 경산 출신인 천 대표는 매사가 결단력 그 자체다. 아내 차금옥(54) 씨와의 결혼스토리도 그렇다. 유학을 준비하면서 소개받은 첫날 마음에 들어 다음날 또 만나서는 “유학시험 준비하러 절에 들어가니 결혼할 생각있으면 연락달라”는 말 한 마디만 던져놓고 돌아섰다고 한다. 그는 “모든 일에 결정이 빠르다. 이거다 싶으면 주저하지 않는 성격이라 결혼도 속전속결로 정했다”며 싱긋 웃었다.
두 딸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큰 딸 솔지(26) 씨는 대학을 졸업했고, 작은 딸 솔비(21) 씨는 대학에 재학 중이다. 그는 ‘100세 시대에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알고 그 일에 매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두 딸에게 1년 정도 삶에 대한 목표의식을 정립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기 권했다.
작은 딸이 생화학을 전공하고 있어 혹 아버지가 하는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냐고 묻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냐”며 말을 아꼈다.
딸바보의 기미가 다분한 그는 결코 외향적이지 않다. 묵묵히 자신의 길만 갈 뿐이다. 의미없는 만남이나 저녁 술자리는 하지 않는다. 사업 구상도 모자라는데 헛으로 보낼 시간은 없다는 것이다. 한번은 친구를 만나고 들어오는데 큰 딸이 “아빠도 친구가 있었어?”라며 놀란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 탓에 자신의 생활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는 걸 즐기지 않는다. 학교에 있던 인연이나 사업상 알게 된 지인이 특강이나 주례를 부탁해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내 능력 이상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한눈을 팔거나 딴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며 “주말에 친구도 만나고 싶지만 나 같은 사람이 사업을 하려면 정말로 망망대해에서 일엽편주로 파도를 헤쳐가야 한다”고 말했다.
“술 마시고 놀다 보면 사업감각이 무뎌지고 안이해집니다. 직원과 회사를 위해 대표로서 최고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맞고, 그 긴장을 늦추는 순간 대표 자리에서 내려 오는 게 맞습니다.” 단호한 어조였다.
▶일에서 운명을 찾다=술, 담배는 물론 골프나 등산도 하지 않는다. 운동이라고는 회사 근처 석촌호수를 산책하는 게 전부다. 세상은 운명이 있다고 믿는 그는 결핵을 앓았기 때문에 혼자서 공부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고, 그래서 유학생활도 마치고 사업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얘기를 듣다 보면 운명론자 같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숙명이라고 한다. 삶의 재미를 찾기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하고 거기서 성공함으로써 희열을 느끼는 것이다.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도 대기업에서 임원을 지낸 숙부의 지원이 컸고, 죽마고우이기도 한 회사 임원들이 그에게는 그냥 찾아온 인연이 아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기술을 나에게 준 것은 기적이고, 내 것이 아니니 내가 가질 수도 없다. 그냥 지금 자리에서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라는 그는 하고 있는 일 자체가 삶의 재미이자 활력소라고 말한다.
지금의 사업을 시작한 이유를 묻자 다소 ‘비장한’ 대답이 돌아왔다.
“서민은 돈 많은 대기업에, 권력있는 사람에게 항상 부당하게 당해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나 혼자 연구만 하면서 살 수 있었지만 미력하나마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한 끝에 치료가 필요한 이들에게 양질의 의학을 제공하자는 결론에 이르게 됐습니다.”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은 독학을 하면서 치열하게 고민했던 경험이 쌓여 가능했다.
연구활동과 사업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는 질문에 대뜸 정년 문제를 들고 나왔다.
“직장인은 퇴직에 대한 불안감에 늘 시달리는데, 은퇴는 없애야 하며 평생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직급이 올라갈수록 현장감각이 떨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20년 회사생활을 하다보면 스스로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계속 일을 하려면 어떤 직급이든 현장에서 도망가지 말아야 합니다.”
현장을 지키고 최고의 감각을 유지한다면 퇴직은 필요없게 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후배 벤처기업가에게=사업마다 특성이 달라 자신의 영역이 아니면 얘기를 안 하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는 분자진단에 대한 질문이 오면 보통 10분 정도로 끝낸다. 그리고 어디가서 전달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곳에 가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모습을 익히 봐왔던 터다. 자신이 다른 사업을 하지 않는 것도 모르는 분야는 애초에 시작을 않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전문가라고 자처하면서 착실히 준비를 해도 성공하기 힘든 게 벤처라는 설명이다. 신생 창업의 경우 몇 차례 사업을 수정할 각오를 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투자하는 사람도 경영하는 사람도 사업의 틀을 바꾸는 것을 인정하고, 적절한 시점에 궤도를 수정하면서 고비를 넘길 준비가 돼 있지 않으면 성공하기 매우 힘들다는 게 그의 창업 지론이다.
“누가 사업을 한다고 자문을 구한다면 3~5년 동안의 사업계획을 갖고 오라고 해서 자금을 대주고 5년 후에 보자며 그냥 맡겨둘 겁니다.”
전문 심사를 위한 인프라가 미흡하고 사업 수정을 용납하지 않는 환경에서는 창업이 힘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래도 남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면 성공 가능성은 더 있다고 했다. 차별화할 수 있는 사업 아이템 5개 정도는 쥐고 있어야 하고, 지금까지 남이 생각지 못한 것을 계속 발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업에 집중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야 한다. 이러한 습관이 체화된 사람이 성공 확률이 높다는 게 그의 관점이다.
“특전사는 특별히 잘 훈련된 군인이죠. 죽을 고비를 넘기며 특수훈련을 받았고, 그래서 특전사 이미지에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훈련도 않고 특전사 이미지만 좇는 경향이 있어요.”
인생도 멋있는 삶이 되려면 죽기 살기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릴적 결핵을 앓는 와중에 차디찬 얼음물에 뛰어든 것도 자신과 싸우고 단련시키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선 데는 그의 ‘독종 스타일’이 톡톡히 한몫한 것으로 보여진다.
▶항상 낮은 곳으로 임하다=그는 지나치게 겸손하다. 평범한 한 사람으로 사는 게 소신이고, 책임이 있어 할 뿐이지 특출나지 않음을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 내 할 일만 열심히 하는 것도 벅차다며 강연 같은 대외 활동을 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직원 가정을 방문하고 싶어 한다. 내 주변부터 챙기는 것이 나를 둘러싼 환경을 옹골차게 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나이 50이 넘어 굴곡 없는 삶이 어디 있으며, 눈물 흘려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저마다의 기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웃고 우는 게 아닐까. 그가 겪은 인생의 시련. 차압딱지가 덕지덕지 붙은 집, 학교 중퇴까지 하게 한 결핵, 맨손으로 시작한 유학, 사업 초창기 때 같이 일하던 직원의 배신. 자신이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칠 때도 있었다. 아는 사람이 볼까봐 마음 놓고 우는 것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한 번은 독일에서의 학회에 참석했다 밤 늦은 시간 호텔 앞 강가에서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그만했으면 하는 생각에 죽을 생각도 순간 뇌리를 스쳤다. 대성통곡을 하다가 문득 모든 게 뜻에 의해 준비된 과정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 이 장소에 머물 수 있는 것도 나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이라는 깨달음이다. 힘든 일이 닥치면 또 다른 축복이 온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아가면서 이제 스스로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자신감도 생겼다.
혼자 서는 힘이 생기면서 결코 다른 사람 핑계를 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누구도 탓하려고 하지 마라. 내 인생인데 누구 핑계를 댄다고 일이 다시 좋아지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그랬고, 사업도 그러했다.” 그의 각오다.
꿈꿔온 모든 것을 이제 이룬 게 아니냐는 질문에 “지금부터 시작이다. 이제부터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해보고 싶다”고 한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보다 앞으로의 길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천 대표다운 대답이다.
“일년을 하루같이 십년을 일년같이…그를 만든건 쉴새없는 몰입”
나에게 천종윤 대표는 단순한 직장 상사가 아니다. 전남대 의대 석사 과정 동안에는 스승이었고, 지금은 삶의 멘토다.
15년 전 광주의 금호생명과학연구소에서 대표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됐을 때 사무실 한 편에 책상을 마련해주고 손수 실험지도까지 해주셨다. 흔치 않은 일임을 그때는 몰랐다.
배우는 것에 있어서는 나이가 상관없고,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간에 격이 없다는, 천 대표는 그런 분이었다. 그것은 분명 나에게 행운이었고, 나의 실험 기본기는 그때 다져진 것이리라.
그로부터 3년 후 서울에 연고도 없고, 지인도 없는데 “서울 가서 사업 한 번 해보자”는 말씀에 대표만 믿고 무작정 상경을 결심했다. 집을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는 내게 서울생활과 막 시작한 신생 벤처회사의 생활은 무척 힘들었다. 과도한 업무로 몸과 마음이 지쳐서였는지 어느 무렵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대표는 “윤지야, 갈비탕 맛있게 하는 집 있는데 갈비탕 먹으러 가자”하시더니 가게를 나오는 길에 냉장고를 꽉 채울 만큼의 갈비탕을 포장해주셨다.
“결핵은 잘 먹어야 한다”는 말씀에 눈물이 날 뻔했다.
대표도 결핵을 앓아서인지, 마치 친정엄마가 딸을 챙겨주듯 해 투약기간의 힘듦도 잘 견뎌내고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그때의 냉장고는 이제 작게 느껴지지만 버릴 수가 없다. 언제까지나 나에게 대표께서 사주신 ‘갈비탕 냉장고’이기 때문이다.
이화여대에서 교수직을 내려놓고 사업에만 매진할 무렵 목표만큼 실적이 나오지 않고 사업의 돌파구를 찾지 못해 모두가 힘들어 하던 시기가 있었다.
퇴근길에 대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윤지야, 너는 내가 잘난 것 같아 보이느냐? 그렇지 않다. 그저 계속 고민하고, 몰입하고, 노력하는 것 뿐이다.”
그때 나는 지쳐 보이는 대표의 어깨 뒤로 마음의 눈물을 읽었다. 또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 옆에서 보좌하리라 굳게 결심했다.
광주에서 실험을 처음 배우기 시작할 때 대표는 “절대 초심을 잃지 말라”고 했다. 정말 어려운 일을 대표는 실천한 분이다.
일년을 하루같이 십년을 일년같이 쉴 새 없이 고민하고, 몰입하고, 노력하는 대표 같은 분은 나에게 세상에서 단 한 분 뿐이다.
10년 전 몇 안 되는 직원이 모여앉아 담소를 나눌 때 대표가 농담처럼 제안을 했다.
“씨젠은 곧 유명한 글로벌 기업이 될 것이니 모두 그때 사용할 영어이름을 하나씩 짓자.”
그때 대표가 지어준 내 영어 이름은 킴벌리(Kimberlay)였다. 이 이름으로 전 세계를 누빌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정리=이태형 기자/thlee@heraldcorp.com
▶씨젠은?=유전자 수준에서 질병을 진단하는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는 분자진단 전문기업이다. 체외진단 중 하나인 분자진단은 유전자를 분석해 질병의 여부를 판별하는 방법이다. 2000년 설립된 이래 씨젠은‘ 동시다중유전자 검사기술’이라는 획기적인 기술을 자체 개발해 다양한 분자진단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이 기술은 한 번의 검사로 수십여 가지 병원체를 검사할 수 있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환자는 경제적인 맞춤형 진단을 받을 수 있고 의사는 정확한 치료와 많은 환자를 효과적으로 진료할 수 있다는 시장의 호평을 받고 있다. 지식경제부로부터 차세대 세계 일류상품으로도 선정됐다. 2010년 9월 코스닥시장에 상장한 씨젠은 지난달 제4회 헤럴드경제 생생코스닥대상에서 영예의 대상(산업통상자원부 장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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