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

천사표 아내가 광란의 클럽녀? 딸바보 아빠가 아동납치살해범?

영화 ‘밤의여왕’ ‘공범’‘천안함…’ 한순간의 의심이 절망의 나락으로

인간존재의 기원과 구원은 ‘의심’ 수많은 사상가 철학자 이견만 분분

당신이 보고 있는 TV 혹은 신문, 인터넷의 뉴스를 의심해 본 일이 있는가? 아니면 당신이 믿고 있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당신 곁의 연인 혹은 배우자의 사랑은? 의심은 확신과 믿음에 이르기 위한 숙명의 길일까, 방종과 파멸을 향한 악마의 꼬드김일까. 과연 의심은 악덕일까, 미덕일까?

인간 존재의 기원과 구원을 고민해온 수많은 사상가와 철학가들의 생각도 서로 제각각이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의심을 통해서 우리는 진실에 도달한다”고 말했다. 셰익스피어는 “신중한 의심은 지혜의 표지”라고 했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도 “의심은 발명의 어머니”라고 찬양했다. 서구의 오랜 속담은 “의심은 지혜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이른다.

반대도 있다. 영국의 정치가 토머스 페인은 “의심은 천한 영혼들의 친구요, 좋은 교제의 독”이라고 했다. 영국의 목사 조지 허버트는 “의심은 기껏해야 겁쟁이의 덕에 불과하다”고 경멸했으며, 시인 새뮤얼 존슨은 “의심은 대개 무용한 고통”이라고 했다.

어쨌든 의심하고 회의하는 것은 믿음과 확신을 구하고 인지상정, 모든 인간의 본능인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쪽도, 받는 편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인 것도 확실하다. 그래서 카릴 지브란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회의의 시간을 보내고서야 의심과 믿음은 쌍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고 했던가.

영화 ‘밤의 여왕’(감독 김제영, 17일 개봉)의 남자 주인공 ‘영수’(천정명 분)도 어느날 고통스럽고 외로운 의심의 나날을 시작한다. 영수는 ‘순정’ 하나로 외모는 절세 미녀, 성격은 천사표인 아내 ‘희주’(김민정 분)와 결혼하는데 성공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화장실 변기통 속에 꼭꼭 숨겨둔 앨범에서 도저히 아내라고는 상상할 수 없고, 생각조차 하기 싫은 ‘광란의 클럽녀(女)’사진을 발견한다. 게다가 부부동반한 동창회에서 보여준 아내의 남다른 춤실력. 그날부터 영수는 아내의 휴대폰부터 옛 인터넷 홈페이지를 뒤지는 것은 물론, 미행에까지 나선다. 내 옆의 그 혹은 그녀가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공포는 과연 영화 속 영수뿐일까. 영화사가 인터넷을 통해 한 달여간 840여명의 15세 이상 남녀 네티즌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 10명 중 8명은 연인 혹은 배우자의 과거를 의심해본 적이 있으며 뒷조사를 위해 무엇인가를 시도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영화 ‘공범’(감독 국동석, 24일 개봉 예정)에 비하면 ‘밤의 여왕’은 장난에 불과했다. ‘공범’의 주인공 ‘다은’(손예진 분)이 빠져든 의심은 한층 심각하고 충격적이다. “너는 나의 심장”이라며 딸을 애지중지 키워왔던, 다정하고 착하기만 한 아빠(김갑수 분)가 끔찍한 아동납치살해범이었다면? 다은의 의심은 극중 영화로부터 시작된다. 어머니를 어린 시절에 잃은 후, 아빠와 연인처럼 친구처럼 세상 어디에도 없는 살가운 부녀지간으로 살아온 다은. 기자 지망생으로 취업 준비에 바쁜 어느날 친구와 함께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을 극장에서 관람한다. 그런데 다은이 관람한 영화 마지막에는 미제사건의 실제 범인 목소리라며 15년 전 피해아동 부모를 협박한 목소리가 담겨있다. 그런데 아빠의 목소리와 영락없이 닮은 것이다. 다은은 아빠의 과거 뒷조사에 나서는 한편, 사건의 내막을 취재하며 진실에 한 걸음씩 다가간다. 과연 아빠는 진짜 범인일까? 그렇다면 사건 공소시효를 며칠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딸은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가?

때로는 의심이 국가권력과 신의 존재에까지 이르기도 한다. 다큐멘터리 ‘천안함프로젝트’는 합리적 의심이 허용되는 민주주의 사회에 대한 지향 아래, 정부의 사건조사 결과를 반박하는 주장을 영상으로 담아냈다. 미국의 영어학자 베르겐 에번스는 “표현과 행동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 없이는 무의미하며, 의심을 동반하지 않는 사상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메릴 스트립과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주연의 2008년작 ‘다우트’는 한 존경받는 신부의 소년 성추행의 의혹을 소재로 하고 있다. 신부는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 진정한 믿음을 가져온다”고 설파하는 진보적인 사제. 그런데 엄격하고 보수적인 수녀에 의해 소년 성추행 의혹이 교단에 제기되고, 양측은 진실게임을 벌이게 된다. 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과 신부의 행위에 대한 진실공방을 통해 영화는 관객들을 도덕적 딜레마에 빠뜨린다.

폴란드 출신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아이작 싱어는 “회의는 신앙의 일부이며, 모든 신실한 사유자는 회의론자이다”라고 말했다. 의심과 믿음은 결국 한 몸이라 할 텐데,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다면 의심에 이를 것이요, 의심으로 출발한 자는 확신에 다다를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의심이 확신의 영토를 밟는 그 순간이 비극이 될지 해피엔딩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여전히 확실한 것은 인간은 ‘의심하는 존재’라는 것. 자주 생략돼 잊혀지는 데카르트의 말이기도 하다.

“나는 의심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