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40대 중반의 직장인 김성구 씨는 “‘변호인’을 보며 오랜만에 눈물을 쏟았다. 누구 눈치 볼 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전기적 사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영화라고 하지만, 나는 그분의 지지자는 아니다. 다만 영화가 가슴을 후벼파더라”고 덧붙였다. 개봉 직후 일찌감치 ‘변호인’을 관람한 30대의 한 관객은 “영화 중반부터 훌쩍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마지막에는 사람들이 박수를 치더라”고 자신이 본 극장의 풍경을 전했다. 영화평론가이자 전주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인 이상용 씨는 “영화가 감정을 건드리면, 우리 관객들은 울어줄 준비가 돼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영화 ‘변호인’(감독 양우석)이 한국영화로는 역대 9번째 천만영화 등극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12월 18일 개봉한 이후 해를 넘겨 15일까지 957만명을 돌파했다. 주말인 18~19일 중 1000만 관객 달성이 유력하다. ‘변호인’이 상영되는 극장에선 약 한 달간 객석의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유난히 울음에 인색한 한국의 남자, 그중에서도 팍팍한 살림살이에도 눈물 참고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30~40대 가장의 반응이 두드러졌다. 그 풍경은 꼭 1년 전과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초 신드롬에 가까운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1281만명을 동원한 ‘7번방의 선물’도 대한민국의 가슴을 적셨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12년 9월 개봉해 관객 1232만명을 기록한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자아낸 눈물도 뜨겁고 강했다.
채 2년도 안 되는 동안 ‘광해’와 ‘7번방의 선물’을 거쳐 ‘변호인’으로 이어진 천만영화의 행진은 한국인에게 영화란 ‘눈물의 제의’이자 ‘팍팍한 삶과 억울한 죽음의 상처를 위로하는 씻김굿’이며, 극장은 ‘울음의 카니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웅변한다. 한국영화가 머금은 물기가 진할수록 극장을 찾는 관객은 불어났다. 영화 보고 눈물을 흘렸다는 주변의 말에 덩달아 극장을 찾는 관객이 많았다는 얘기다. 울기 위해서 말이다. 왜일까.
▶한국인들의 공감, ‘부당한 권력에 희생되는 개인의 이야기’ 천만을 넘은 9편의 한국영화 대부분을 관통하는 ‘코드’와 그 흥행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거대 권력에 억울하게 희생되는 개인들의 싸움과 비극’을 그린 작품이 대다수다.
‘실미도’는 북파특수공작요원으로 엄혹한 훈련을 받았다가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국가에 의해 희생된 부대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남과 북의 비극적인 대결에 희생된 형제가 주인공이었다. ‘왕의 남자’는 조선 연산의 광기와 피의 정쟁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광대들의 삶을 그렸고, ‘괴물’은 주한미군의 독극물 방류로 나타난 한강의 돌연변이 괴물이 도시 재난의 기원이었지만, 정작 소시민 가족을 사투로 몰고간 것은 무능하고 폭력적인 국가권력이었다. ‘광해’에선 다시 한 번 광기 어린 군주에게 농락당한 광대가 등장했고, ‘7번방의 선물’에선 진실을 외면한 경찰과 사법부에 의해 사회적 약자인 주인공이 비극적 죽음을 맞는다.
‘변호인’은 1980년대 정권 유지를 위해 인권탄압과 용공조작을 서슴지 않았던 공권력와 싸운 한 변호사의 이야기였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담당 남동철 프로그래머는 “근현대사 속에 형성된 한국인들의 집단 무의식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라고 분석했다. 이상용 씨는 “할리우드는 영웅과 지도자, 강자의 이야기인 반면, 한국영화는 약자와 피해자, 희생자의 서사가 주류”라고 말했다.
▶삶과 죽음을 위로하는 씻김굿, 그 처절함
한국영화 역대 천만 작품의 드라마 중심에는 ‘비극’이 있고, 죽음과 이별의 회한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 어느 나라의 흥행 경향에서 볼 수 없는 ‘처절함’이 한국영화에는 진하게 배어 있다. 천만 영화뿐 아니라 때마다 관객들의 지지를 받는 한국영화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처절한 죽음의 이미지나 끔찍한 사건의 계기들이 등장한다. 액션 스릴러 사극은 물론이고 심지어 코미디와 로맨스 영화조차 처절한 정서가 빠지지 않는다.
이는 할리우드 영화의 역대 흥행 경향과는 뚜렷하게 대비된다. 미국영화 사상 최고 흥행작을 보면 1위인 ‘아바타’를 비롯해 ‘어벤저스’ ‘다크 나이트’ ‘스타워즈 시리즈’ ‘슈렉’ ‘E.T’ ‘캐리비안의 해적’ 등 상위권은 모조리 판타지, SF, 애니메이션이 차지한다. 지구를 이끌고 세계를 구원하는 환상 속 영웅들의 이야기가 많다. 이상용 씨는 “한국 관객들은 할리우드 판타지 속 영웅과 지도자들이 제시하는 ‘유토피아적 전망’에 공감하기보다는 역사와 현실로부터 기원한 비극을 통해 공분하고 위로받는 경향이 짙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눈물의 제의, 울음의 카니발
“극장에서 영화를 함께 보며 같이 울 수 있다”는 사실이 한국인들에겐 ‘위로’이며 ‘감정의 정화’다. 현실에서 풀 수 없었던 회한을 영화를 보며 푼다는 것이야말로 국내 극장산업이 유례 없이 호황을 맞은 한 원동력이다.
이에 대해 중요한 역사적 계기에서 매듭을 지어내지 못한 우리 근현대사가 대중들의 ‘응어리’를 만들었고, 이를 영화가 가상적으로나마 해소하고 치유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남동철 씨는 “매듭짓지 못한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이 대중들의 내면에 집적된 감정의 응어리를 건드리니 극장에서 우는 ‘제의로서의 관람’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근현대사 속에서 수많은 비극적 희생과 죽음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채로 금기와 침묵의 대상이 됐으며, 이것이 영화라는 상징물로 나타났다는 견해도 같은 맥락이다. 이상용 씨는 “정치에서 매듭짓지 못한 역사의 반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애도’의 제례를 극장에서 펼치며 관객들이 위로받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풀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