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금융 방지 기대…자본으로 인정
관행적 중도상환으로 투자위험 상쇄
정부의 상환여부결정권 변수로 등장
시장 위축되면 자본비율 재평가해야
자산가격 하락, 유동성 위기 맞물려
금융권 전반으로 신용위험 확산될수
국내 금융사 최근 신종자본 의존도↑
가계부채·부동산 ‘위기’의 불씨될수
모든 생태계에는 ‘룰(rule)’과 ‘원칙’(principle)이 있죠. 전자는 주로 법(law)에 의해서, 후자는 신뢰(trust)에 바탕을 둡니다. 룰을 어기면 처벌을 받고 원칙을 어기면 생태계에서 배제당하게 됩니다. 법이든, 신뢰든 어느 하나라도 무너지면 그 생태계는 위기에 빠졌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크레디트스위스(CS)가 UBS에 팔리면서 코코본드(Contingent Convertible Bond)가 주식보다 못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금융시장이 난리가 났습니다. UBS가 CS 주식은 35억달러라도 주고 사는데 스위스 금융당국은 17억달러의 CS 코코본드는 원리금 전액을 상환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주식보다는 나은 대우를 받을 줄 알고 돈 빌려줬는데 모조리 떼였으니 사실 난리가 날 만도 합니다. 이런 식이면 앞으로 누가 코코본드로 돈을 빌려주겠느냐는 얘기도 나옵니다. 금융회사가 발행한 코코본드를 과연 자본으로 인정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회의론도 커질 듯합니다.
코코본드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등장합니다. 우리말로는 신종자본증권입니다. 당시 은행 등 금융회사가 망하면서 부실을 메우기 위해 나랏돈이 들어갑니다. 구제금융(Bail out)이죠. 재발 방지대책이 필요했죠. 자본을 보강해 부실을 자체적으로 해결할(Bail in) 새 기준을 만듭니다. ‘바젤3’입니다.
자본은 늘려야 하는데 주식을 더 발행하면 돈을 더 내거나 지분율이 낮아질 주주들이 반대할 게 뻔했습니다. 그래서 묘수가 나왔습니다. 채권처럼 돈을 빌리면서 주식처럼 돈을 갚지는 않는 증권, 코코본드입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발행된 코코본드는 2600억달러로 추산됩니다.
코코본드는 의결권도 배당권도 없지만 이자율이 높습니다. 대신 상환을 요구할 수도 없고 후순위 채권보다 변제 순위가 뒤죠. 금융회사가 망하면 주식이 증발하고 그다음이 코코본드입니다. 그래서 AT1(Additional Tier1)으로 표기됩니다. 주식과 함께 기본자본(Tier1)으로 분류된다는 뜻입니다.
원칙은 이런데 사실 세부 항목(detail)에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 만기가 없는 채권인데 코코본드 발행회사는 대부분 중도 상환을 합니다. 다시 발행하려면 발행사의 경영 상태에 따라 이자율이 조정됩니다. 중도 상환을 안 하면 어떻게 될까요? 시장에서 불량 회사로 찍혀 자금 조달 길이 막힐 수 있습니다.
지난해 흥국생명이 코코본드 중도 상환을 안 해서 난리가 났었죠. 그만큼 경영이 어렵다는 증거로 판단될 수 있어서죠. 결국 중도 상환이 이뤄집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디테일이 드러납니다. 중앙은행이나 금융당국 등 국가기관이 코코본드의 상환 여부에 대한 중요한 결정권을 갖는다는 점이죠.
우리나라에서 코코본드를 중도 상환할 때는 금융감독원장의 허락을 받아야 합니다. 코코본드 갚다가 회사가 어려워지면 안 되니 금융당국이 사전에 이를 막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CS발 코코본드 사태의 핵심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식보다 나아야 하는데 더 못한 대우를 받아도 법적으로 문제는 없습니다.
CS 코코본드 발행서류에는 ‘스위스 금융당국은 어떤 우선원칙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회사가 공적 부분에서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viability event)이면 감가상각(written down)할 수 있는 조항도 존재합니다. 일단 정부가 개입하면 정부가 결정한다는 뜻이죠.
스위스 정부는 UBS에 CS를 넘기면서 무려 1000억달러 한도의 유동성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2017년 스페인 방코포퓰러가 망했을 때는 주식도 코코본드도 모두 ‘0원’으로 처리됐습니다. CS의 경우에도 코코본드와 함께 주식까지 0원으로 처리할 수도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CS 최대주주는 사우디국립은행(SNB)입니다. 중동 자본은 글로벌 은행들의 주요 주주들입니다. 코란은 이자를 금지합니다. 무슬림 자본은 채권에 직접 투자하는 대신 은행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자사업에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CS에서 무슬림 자본이 전액 손실을 보면 그 파장이 상당할 수 있습니다.
CS는 직원 5만여명 가운데 최소 9000명 이상이 감원될 전망입니다. 스위스 인구가 880만명 가운데 1만명은 우리나라로 치면 5만명 이상의 충격입니다. CS 직원들도 회사 주식을 꽤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자리 잃는데 그동안 모은 돈까지 상당 부분 사라지면 국가경제에 큰 부담입니다.
그럼 이번 CS 코코본드 사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될까요? 코코본드도 주식처럼 시장에서 실시간으로 거래됩니다. 발행사의 재무적 위험을 반영하죠. 이번 사태로 코코본드로 자본을 보강한 은행들이 시장에서 재평가를 받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많을수록 부정적이겠죠.
기록적인 자산 유출과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CS의 지난해 말 기준 보통주자본(CET1) 비율은 14.1%로, 전년(14.4%) 대비 0.3%포인트 낮아지는 데 그쳤습니다. 다른 유럽 대형 은행들과 비교해봐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자본비율로 보면 멀쩡한데 회사의 실상은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습니다.
자본비율 수치도 못 믿겠다는 불안이 확산될 수 있습니다. 코코본드 중도 상환이 이뤄지면 그다음에는 더 투자하지 않으려 하겠죠. 이러면 지금의 은행 자본비율에서는 코코본드를 빼야 할지 모릅니다.코코본드가 제 기능을 상실하면 기본자본을 늘리는 방법은 증자밖에 없습니다. 주가 하락 요인이죠.
최근 미국과 유럽발 은행 발작은 사실 신용(credit)에 흔들린 위기죠. 지난해부터 전 세계적으로 금리가 오르면서 자산 가격이 하락합니다. 가장 많은 자산을 가진 금융업인 은행이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에 예금과 고객 자산이 움직이면서 유동성에 문제가 생긴 결과입니다.
보유 자산의 종류, 위험 헤지 여부 등에 따라 다르지만 자산 가격 하락에서 완전 자유로운 은행은 없습니다. 보유 자산 가격은 하락해도 금리 상승에 따른 이자수익 증가가 이뤄지면 별 탈은 없겠죠. 그런데 경기가 침체돼 돈 빌려 쓰는 이들의 사정이 어려워져 이자장사까지 잘 안 되면 정말 낭패입니다.
은행들이 재무건전성에 민감해지면 자금 중개 기능, 즉 대출을 깐깐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민간부분의 차입 축소와 함께 소비 둔화와 경제 침체로 이어집니다. 미국에서는 중소형 은행들이 많이 보유한 상업용 부동산 관련 대출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CS의 위기는 UBS로의 매각으로 일단락될 수도 있습니다. 은행의 건전성과 유동성 위험에 대한 진짜 고민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금융회사들이 주식보다는 채권형태로 자본 보강을 많이 해온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가계부채와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위험이 정말 걱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