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기교·아름다운 멜로디

고뇌하는 천재…인간적인 면모도

대중·애호가 모두가 사랑한 작곡가

198㎝의 큰 키, 쫙 펼치면 30㎝에 달하는 큰 손으로 최악의 난곡을 쓰고 연주한 라흐마니노프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클래식 음악가로 꼽힌다. 올해는 탄생 150주년을 맞았다. [위키피디아]
198㎝의 큰 키, 쫙 펼치면 30㎝에 달하는 큰 손으로 최악의 난곡을 쓰고 연주한 라흐마니노프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클래식 음악가로 꼽힌다. 올해는 탄생 150주년을 맞았다. [위키피디아]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3만 개의 음표, 40분에 달하는 곡의 길이.

천재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의 실화를 다룬 영화 ‘샤인’에서 주인공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하며 정신 장애를 앓는다. 피아노 협주곡 3번은 클래식계의 ‘슈퍼스타’인 조성진마저도 ‘가장 어려운 곡’이라고 손에 꼽는 곡이다. “초인적인 테크닉을 요하면서도 기교에만 집중하면 감정 표현을 할 수 없고, 감정에만 집중하면 기교가 흔들리기 때문”(류태형 음악평론가)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연주할 수 없다”(영화 ‘샤인’ 중)는 난곡이다.

198㎝의 장신, 손가락을 쫙 펼치면 무려 30㎝, 보통 사람들의 1.5배에 달하는 긴 손을 가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 올해는 라흐마니노프의 탄생 150주년을 맞는 해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이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클래식 1위(피아노협주곡 2번) 자리를 놓치지 않는 주인공이다.

삶이 곧 드라마…기괴한 큰 손의 피아니스트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를 상징하는 라흐마니노프는 유복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삶은 불행했다. 집안의 파산, 방탕한 아버지, 부모의 파경, 두 누나의 죽음…. 그럼에도 ‘타고난 천재성’은 일찌감치 세상이 그를 알아보게 했다.

열여덟 살이었던 1891년, 그는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작곡했고 그 다음 해에는 오페라 ‘알레코’를 선보였다. 음악계에서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이름이 알려진 계기다. 유명세와 함께 시련도 빨리 찾아왔다. 지난 1897년 교향곡 1번의 초연 무대가 참패했다. 당대 평론가들은 ‘재앙을 그린 작품’이라고 혹평했다.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은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 협주곡과 달리 교향곡에선 바흐나 모차르트처럼 음악을 엮어 제시하는 장인성은 별로 없다”고 평가했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HJ컬처 제공]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HJ컬처 제공]

그 시절 라흐마니노프는 일생일대의 슬럼프를 마주한다. 온갖 비난을 마주하며 신경 쇠약에 시달렸고, 깊고 슬픈 절망이 그의 생을 뒤덮었다. 그때 그에게 손을 내민 ‘구원자’는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 박사였다. 최면을 통해 “새로운 협주곡을 써내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한 일종의 ‘세뇌 치료법’이 효과를 봤다. 기괴하도록 큰 손을 가진 피아니스트의 일화는 그때부터 괴물이나 천재가 아닌 한 인간으로 마주하는 드라마가 됐다. 류 평론가는 “자신의 음악을 고민하며 신경 쇠약을 안고 살아온 연약함을 가진 한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준 달 박사와의 일화는 많은 사람들이 라흐마니노프를 보다 가깝게 느끼게 한 드라마”라고 말했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를 통해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작곡상과 음악감독상을 수상한 이진욱 음악감독은 “극심한 우울증에 걸린 라흐마니노프가 달 박사의 치료를 통해 만들어낸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스토리가 굉장히 특별하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나온 이 감독은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를 듣고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게 됐다. 그는 “라흐마니노프의 삶의 조각들이 음악으로 불리기 전, 한 인간의 힘들었던 삶이 공감됐다. 이를 계기로, 그의 음악은 클래식의 고루함으로 설명될 수 없는 삶 자체로서의 음악으로 다가왔다”며 “음악을 이해한다는 것은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까다로운 기교·멜로디…그 속에 슬라브의 애수 담아

라흐마니노프가 지금 이 시대에 이토록 사랑받는 음악가로 꼽히는 것은 ‘멜로디가 가진 힘’ 때문이다. 허명현 음악평론가는 “한 번만 들어도 귀에 감기는 음악이자, 멜로디를 가장 잘 뽑아내는 마음을 울리는 작곡가”라고 평가했다. 류 평론가 역시 “소수의 사람만이 가진 코드를 지향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음악을 만들었다”며 “‘대중적’이라는 주홍글씨를 안고 있긴 하지만, 그의 피아노 작품은 클래식의 핵심 코어 애호가들도 쇼팽과 더불어 평생을 들어도 반복 감상할 수 있는 작품으로 인정한다는 데에 위대성이 있다”고 말했다.

고난을 딛고 다시 펜을 든 라흐마니노프가 쓴 ‘피아노 협주곡 2번’(1901)은 세기의 명곡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러시아 피아니즘의 정수를 보여주며 재기에 성공했다. 음악계 최고 영예인 글린카 상도 받았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선율과 고난도의 기교는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사랑 받았다. 다양한 영화, 드라마, CF에도 사용됐다.

198㎝의 큰 키, 쫙 펼치면 30㎝에 달하는 큰 손으로 최악의 난곡을 쓰고 연주한 라흐마니노프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클래식 음악가로 꼽힌다. 올해는 탄생 150주년을 맞았다. [위키피디아]
198㎝의 큰 키, 쫙 펼치면 30㎝에 달하는 큰 손으로 최악의 난곡을 쓰고 연주한 라흐마니노프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한 클래식 음악가로 꼽힌다. 올해는 탄생 150주년을 맞았다. [위키피디아]

2악장의 주제 선율은 에릭 카멘의 올드 팝 ‘올 바이 마이 셀프(All By Myself)’에 샘플링 되며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올랐다. 특히 협주곡 2번의 시작을 알리는 ‘클렘린의 종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울림이 있다. 장일범 음악평론가는 “라흐마니노프는 태생적으로 러시아를 사랑한 사람으로 어린 시절부터 러시아 정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며 자랐다”며 “그의 여러 작품에서 종소리는 각별히 중요하게 자리하고, 특히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종소리는 큰 운명이 닥쳐오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류 평론가는 “당대는 시각적인 요소를 고려해 작곡하는 시대가 아니었는데도, 종소리를 통해 특정 장면을 상기할 수 있는 시각적, 회화적 성격의 음악을 써냈다”고 분석했다.

‘피아노협주곡 3번’은 각종 피아노 콩쿠르에서 가장 많이 선택되는 곡이다. 허 평론가는 “워낙 까다롭고 기교가 가득 찬 곡이다 보니 피아노를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이 사람은 피아노를 엄청 잘 치는구나’라고 느낀다”며 “이 곡을 연주하는 것 만으로 엄청난 기량의 피아니스트로 인식하는 경향이 크다”고 말했다. 이 곡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의 기량도 점차 좋아지고 있다. 류 평론가는 “100m 달리기의 기록이 경신되듯, 테크닉의 장벽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녹음 기술이 발달하고 있는 현재 이 난곡(難曲)은 앞으로 더 좋은 연주가 많이 나올 것”이라고 봤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협주곡은 ‘고통스러운 기교’와 격정적이고 뜨거운 멜로디가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것 만이 전부는 아니다. 그 안에 묻어있는 러시아 음악 특유의 정서가 관객의 마음을 흔든다. 허 평론가는 “기교적이고 외향적인 작품들이 더 두각을 보이지만,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본질에는 슬라브 민족의 애수와 허무가 담겨있다”며 “피아노 협주곡 2, 3번 역시 (곡 자체의) 퍼포먼스가 큰 작품이나 (그 보다) 러시아 특유의 황폐함이 감정을 빼앗는다”고 말했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