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차이콥스키, 리스트
뮤지컬로 들어온 클래식 거장들
과수원컴퍼니 ’작곡가 시리즈‘
역사 속 인물의 삶을 통해
현재의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
중국, 일본으로 판권 수출해 공연
대학로 창작의 힘 보여준 K-뮤지컬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오, 푸쉬킨, 강물처럼 흘러가는 음악.”
참담한 ‘전쟁의 시대’를 살아간 클래식 음악 거장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1893)가 무대로 걸어나왔다. 러시아 시인 푸쉬킨의 동상 앞에 그가 서자 ‘그 유명한’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절묘하게 뒤섞인 넘버(‘푸쉬킨 동상 앞에서’)가 흐른다. 뮤지컬이 클래식을 담았다. ‘악성(樂聖)’ 베토벤을 지나 차이콥스키로 당도했다. 차기작은 리스트로 예정하고 있다. 이른바 ‘위대한 작곡가’ 시리즈다.
“차이콥스키는 낭만주의 정점에 있는 작곡가예요. 편성 자체도 대단위인 데다, 어떻게 보면 훅이 있어요. 미국 디즈니 음악의 시초 역시 차이콥스키였고요.”
무대에선 ‘호두까기 인형’,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오페라 ‘오네긴’을 비롯해 교향곡, 가곡 등 차이콥스키의 명작 10곡이 뮤지컬 음악으로 다시 태어났다. ‘불후의 명곡’들을 주인공으로 가져오기 위해 무대는 ‘최초의 시도’가 이어졌다. 대학로 뮤지컬 사상 처음으로 ‘9인조 오케스트라’가 무대 안쪽에 자리했다. 바이올린 2대, 첼로, 비올라, 플루트, 클라리넷, 피아노는 물론 팀파니까지 자리했다. 기존 대학로 뮤지컬을 두 편(한 편당 평균 제작비 4~7억원)이나 만들 수 있는 제작비를 투입했다.
최근 대학로에서 만난 뮤지컬 ‘안나, 차이코프스키’를 제작한 허강녕 과수원컴퍼니 대표는 “차이콥스키의 음악들이 뮤지컬에도 잘 어우러질 거라 판단해 음악이 중심이 된 무대를 만들고자 했다”고 말했다.
■ 베토벤, 차이콥스키, 리스트…‘작곡가 시리즈’의 탄생
‘작곡가 시리즈’의 탄생은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이야 클래식 거장을 전면에 내세운 뮤지컬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곳은 ‘블루오션’이자 ‘불모지’였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땅이었다.
대학에서 ‘국악 작곡’을 전공한 허강녕 대표는 대중음악 공연 기획을 해오다 멸종한 ‘바다사자 강치’ 이야기로 독도 문제를 다룬 뮤지컬 ‘리멤버’로 업계에 첫 발을 들였다. 2009년부터 무려 7년간 독도 이야기에만 매달렸다. “첫 작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어려움도 많다 보니 이젠 할 만큼 했다는 생각도 들고, 본업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어요.”
영감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왔다. 애초 ‘작곡가 시리즈’라는 ‘빅 픽처’를 그린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지쳐있는데, 힘을 낼 수 있는 작품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누가 귀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같았어요. 소재를 찾고 찾다가 찾은게 베토벤이었어요.”
뮤지컬 ‘루드윅:베토벤 더 피아노’(12월 20일 개막 예정)가 탄생까지는 3년의 시간이 걸렸다. 작품을 준비하던 중 허 대표가 제작한 ‘베토벤 심포니’가 먼저 막을 올렸다. 이 작품은 ‘루드윅:베토벤 더 피아노’로 확장되고 깊어졌다. 2018년 초연, 올 연말 네 번째 시즌으로 무대에 오른다.
“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을 주라는 미션 같았어요. 전 위안보다는 희망에 더 방점을 뒀어요. 위안이 현재의 상황이라면, 희망은 미래지향적이니까요.”
“희망을 주기 위한 작품”의 소재로 베토벤만한 인물은 없었다. “상상도 못한 고통을 이겨낸” 데다, “전 세계 최고의 히트 작곡가”(허강녕)였다. 그 안에 숨은 이야기도 무궁무진했다.
‘루드윅:베토벤 더 피아노’은 무엇보다 베토벤을 다루는 방식은 신선하다. 극적인 드라마가 담긴 단편적 에피소드가 아닌 한 사람의 인생을 관통해 무대로 가져왔다.
허 대표는 “베토벤의 전 인생을 보면 두 가지 꿈이 있었다”고 했다. “모차르트를 넘어서는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과 내 가족을 갖고 싶다는 꿈이었어요.” 작품은 위대한 작곡가의 깊은 내면 안으로 들어가 그의 ’진짜 이야기‘와 감정을 꺼내온다. 한 사람의 삶을 휘감은 열망, 열망 안에 피어난 고통과 절망, 그것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위대한 ‘변곡의 순간’들이 작품 안으로 녹아난다.
“마치 신이 있다면, 그 모든 고통과 고통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만든 사람같았어요.” 허 대표는 “현재가 어렵고 절망적이라도 지금 바꿀 수 있고, 꿈을 꾸면 된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며 “그것이 베토벤에 대한 일종의 예의였다”고 말했다.
이는 과수원컴퍼니의 ‘작곡가 시리즈’가 추구하는 방향성이기도 하다. ‘안나, 차이코프스키’에서도 엄혹한 시대에서 부딪히는 이념과 사상, 금기된 사랑에 굴복하고 좌절하다 다시 서는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담는다.
“과거 속 인물의 삶을 통해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 긍정적이고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이야기를 싶었어요. 때로는 반면교사 삼을 수도 있고요. 현재의 우리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하려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요.”
시리즈의 세 번째 작곡가는 리스트다. 허 대표는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리스트의 음악과 삶을 담아낼 수 있는 작품을 개발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 세계로 간 대학로 ‘창작뮤지컬의 저력’
‘보편타당한 이야기’는 한국을 넘어 세계로 향했다. 과수원컴퍼니가 제작한 두 작품이 판권을 수출, K-뮤지컬의 새로운 길을 닦고 있다. 지난 29일 일본에선 ‘루드윅: 베토벤 더 피아노’가, 전날엔 ‘브라더스 까라마조프’가 중국에서 막을 올렸다. 중국 현지 반응은 특히나 뜨거워 매진 사례까지 이어지고 있다. 허 대표는 “(과수원컴퍼니는) 창작뮤지컬을 만들어 해외에 진출하는 지향점을 가지고 출발했다”고 말했다.
“방탄소년단과 같은 K팝 그룹이 미국 빌보드 1위를 한다는 것은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어요. 거기에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게임’까지 말도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잖아요. 이런 일들을 보며, 뮤지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과수원컴퍼니의 작품들은 K-뮤지컬의 힘을 여실히 보여준다. 탄탄하고 밀도 높은 스토리, 아름다운 음악, 촘촘하게 직조된 요소 요소가 오랜 시간 성장한 대학로 창작 뮤지컬의 저력을 담고 있다. 허 대표는 “제작을 시작할 때 이 작품이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지 고민해 방향성을 그려나간다”고 했다.
전 세계에서 통하는 인물과 소설을 가져왔지만, 이를 무대로 구현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허 대표는 “잘 알려진 인물을 다루는 것은 쉬운 무기가 될 수 있지만, 그만큼 만들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실존인물을 다루는 것은 자칫 잘못하면 이용하는 것밖에 되지 않아요. 한 사람의 인생과 사건, 그것이 주는 메시지의 방향성을 세워 정성을 들여 만들어야 작품에도 힘이 생겨요.”
K-뮤지컬 시대를 함께 열고 있는 허 대표는 우리 뮤지컬 시장의 독특한 구조가 지금의 성취를 이끌었다고 보고 있다. 한국 뮤지컬 시장은 지난 20여년 사이 빠르게 성장했다. 2001년 매출 200억 원을 달성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을 기점으로 국내 뮤지컬 시장은 빠르게 대중화, 산업화에 접어들었다. 현재 4000억원 규모의 시장으로 성장했다.
허 대표는 “이 작은 내수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해 뮤지컬 한 편이 2~3개월씩 이어가고 있다”며 “N차 관람을 하는 회전문 관객들과 함께 성장해 경쟁력 있는 작품이 생겨나고, 배우들도 더 좋은 조건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대극장은 물론 대학로를 찾아오는 관객의 힘이 업계의 선순환을 이끌어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됐어요. 그것이 동력이 돼 일본과 중국으로도 진출할 수 있게 됐다고 봐요. 이젠 K-뮤지컬 시대도 가능하리라 생각해요. 창작진, 프로듀서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노하우를 쌓으며 역량과 기반을 마련했어요. 일본, 중국을 넘어 뮤지컬 본토인 미국, 영국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저 역시 그런 꿈을 꾸고 있고요.”
sh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