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파보 예르비가 창단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마에스트로가 음악 만들어가는
과정이 좋아서 모이는 사람들”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종소리가 세 번 울리면, 현악기의 조심스러운 선율이 시작된다. 현악 오케스트라는 고요한 적막의 한가운데서 소리를 깨운다. 물결이 파동을 만들듯, 진동으로 서서히 현의 울림이 퍼지자 단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을 향한다. 그곳에 자리한 마에스트로 파보 예르비. 그의 손짓에 따라 내면 깊숙한 곳에서 시작된 소리의 물결이 뻗어나가 장엄함을 만든다. 파보 예르비와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지난 3~5일 서울, 통영, 경기에서 열린 세 번의 내한공연의 첫 곡으로 아르보 패르트의 ‘벤저민 브리튼을 추모하는 성가’를 선택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쁜 지휘자로 꼽히는 파보 예르비와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서로의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이 선곡이었다.
‘파보 예르비 &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들려준 세 번의 한국 공연은 ‘메인 디쉬’(main dish)의 선곡이 조금 달랐다. 서울과 통영에선 차이콥스키 5번을 선택했다면, 지난 5일 수원 경기아트센터 대극장에서의 공연에선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을 들고 왔다.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가 ‘가장 잘 연주하는 교향곡’ 중 하나로 꼽히는 곡이 시벨리우스인 만큼 마지막 한국 공연은 특히나 많은 기대를 모았다.
현악기의 피치카토와 새소리 같은 플루트가 시벨리우스 2번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파보 예르비의 손짓에 맞춰 능수능란하게 강약 조절을 이어가는 악기 소리가 시시각각 귓전에 와 닿으며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파보 예르비의 움직임은 연주자들의 손과 입이었다. 예르비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오케스트라는 유기적인 연주를 이어갔다. 2악장에서 파보 예르비가 무릎 가까이로 손을 내렸다가 머리를 향해 퍼올릴 때, 현악기의 풍성한 사운드가 만들어낸 하모니는 압권이었다. 슈박스 형태의 공연장의 특성상 교향곡의 매력을 살릴 만큼의 공명은 부족했음에도, 파보 예르비와 에스토니안 오케스트라의 시벨리우스 2번은 관객을 겨울바람이 휘몰아치는 침엽수 숲으로 데려가기에 충분했다. 압도적인 몰입도의 공연이었다.
이날 파보 예르비와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은 서로를 향한 두터운 신뢰와 애정, 음악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묻어나서다. 특히 단원들의 눈이 일제히 파보 예르비를 향하고, 그의 신호를 기다리며 호흡하는 장면 장면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지난 7월 에스토니아에서 열린 ‘패르누 페스티벌’ 파보 예르비 아카데미에 참석한 뒤, 콘서트의 피날레 무대에 오른 최재혁 지휘자는 “예르비 선생님은 악보를 반복 공부해 그것의 DNA를 내 안에 새긴 뒤, 무대 위에선 작곡가와 친구가 돼 나만의 쇼를 펼치라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대에선 ‘불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긴장감을 오케스트라에게 줘야 한다’, 어디로 어떤 지시를 줄지 모르니 집중하게 되는데, 악보에 없는 것을 즉흥적으로 완벽히 연주할 때 좋은 감정을 느끼게 된다는 점을 중요하게 일러줬다”고 말했다.
파보 예르비가 지휘할 때 중점을 두는 부분은 그의 무대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에스토니아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은 놀랍도록 마에스트로에게 집중한다. 악기와 연주자 안으로 지휘자의 해석을 성실히 흡수한 음악을 들려준다. 악보에선 약속되지 않은 예르비 만의 해석과 즉흥도 당황하지 않고 받아들여 짜릿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파보 예르비라는 세계적인 지휘자의 리더십과 이 오케스트라의 분위기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었다.
서로를 향한 존중과 신뢰, 음악을 통한 화합이 강렬히 느껴지는 것은 오케스트라의 태생과 성장 과정의 특이점이 이유가 된다. 사실 연주자 단원에게 오케스트라는 직장생활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지라도, 직장생활이란 ‘전생의 업보’가 내려앉은 ‘현생의 무게’다. 음악은 예술의 영역에 있지만, 오케스트라 단원은 보통의 직장인과 같은 노동자의 영역에 놓여 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예술과 생활, 예술과 일의 경계에 놓인 사람들이니 온전히 예술의 행복을 만끽하는 것이 관객보다도 쉽지 않을 수 있다.
이 오케스트라의 특별함을 오롯이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는 단체라는 점에서 나온다. 단원들 모두 자발적으로 모였고, 그 중심엔 파보 예르비라는 마에스트로가 있다.
파보 예르비는 이 악단을 창단한 것에 대해 “에스토니아의 젊은 연주자들은 연주 실력과는 별개로 타국의 연주자들과 함께 연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며 “이러한 젊은 연주자들에게 전 세계의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 일하고 인맥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전 세계의 많은 연주자들이 파보 예르비와의 한 무대를 꿈꾸며 모여들고 있다. 연주자의 선발 기준도 확고하다. 결정권은 전적으로 파보 예르비가 갖는다. 그는 “정말 좋은 연주자이지만 우리에게 맞지 않는 사람이 있고, 우리에게 딱 들어맞는 연주자들이 있다”며 “열린 마음으로 소통하고 매우 긍정적인 에너지를 갖고 있는 연주자들을 선발한다”고 말했다. 일단 이 오케스트라에 발을 디디면 중독처럼 다시 돌아온다. 파보 예르비는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을 아직 한 명도 본 적이 없다”며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던 아이들은 대부분 학생이었는데 이제 그들은 악장이거나 수석 연주자로 활동 중이다. 에스토니아 음악계의 새로운 리더가 됐다”고 말했다.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한국인 단원인 이경은은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많은 단원들이 유럽 각지의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고 있다”며 “사실 7-8월에 있는 페스티벌이기 때문에 다들 휴가를 반납하고 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에스트로가 음악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좋아서 모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뭔가 다른 눈빛을, 다른 심장을 가졌구나, 하는 사람을 마에스트로가 직접 찾아내고 초대하기 때문에 리허설 시간이 조금 오버되더라도 상관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며 “무엇보다도 한명 한명 마에스트로가 직접 고르고 부른 단원들이라 확실히 다른 것 같다. 오로지 음악을 위해서라는 하나된 마음으로 행복한 연주를 하고 있다”고 했다.
에스토니안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외에도 파보 예르비는 현재 취리히 톤할레 오케스트라와 NHK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 도이치 캄머필하모닉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오는 12월엔 도이치 캄머필하모닉과 함께 한국을 찾는다.
sh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