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제주양씨 학포종가
양팽손(1488~1545)·양응정(1519~1581) 부자는 국사책에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16세기 이후 우리나라 남부지방 문무겸장 호국리더들을 키운 중심 인물들이다.
양팽손은 정암 조광조(1482~1520)와 과거급제 동기다. 사간원 정언 벼슬을 하다가 기묘사화(1519)로 삭탈관직 당한 뒤 조광조의 시신을 수습해 초가(훗날 죽수서원)에 추모당을 만들고 자신도 죽어서 그곳에 배향된다.
을묘왜변 때엔 백세례·양달사·백광훈 등의 제자들이, 임진왜란 때엔 양산숙(1561~1593)·양산룡 두 아들과 최경회·신립·박광전·안중묵·정운·김덕우·최경운·최경장·최경창 등이 의병 리더로 나섰다.
문무겸장 리더들의 연대는 양응정의 사돈 고경명 부자, 사위 김광운·김두남, 외가의 김인갑·김의갑, 아들 산숙의 동문 조헌·김덕령 등 내로라하는 의병장으로 연결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양응정의 아들 양산룡이 임진 의병을 일으켜 김천일 장군을 추대했고 군량을 조달했다. 양산숙은 선조에게 밀서를 바치고 돌아와 김천일 부대에 합류해 진주성을 사수했고 김천일·최경회·고종후와 함께 순절했다. 최경회는 논개의 남편이다.
정유재란 때 양산룡 형제가 모친인 박씨부인을 모시고 배를 탔는데 갑자기 왜적선에 맞닥뜨리자 부인 박씨가 “대부의 지어미로서 욕볼 수 없다”며 투신했고 양산룡의 처 유씨와 누이들(김광운·김두남의 처 양씨들), 은장도로 자결한 양산숙의 처 이씨 등 9명이 순국한다. 이같은 충효는 양응정의 기상을 이은 것이라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한다.
후손인 구한말 의병장 양한묵(1862~1919)은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인으로 투옥돼 옥중순국한 독립지사다. 양회일(?~1908)은 을사늑약(1905) 후 화순 쌍산의소(사적 제485호)에서 의병을 일으켜 능주 관아를 점거, 화순으로 진격하다 일본군에 패해 체포·유배되고 다시 거병하다가 투옥돼 옥사했다.
주지하다시피 제주양씨는 삼성혈 세 별 중 한 신인(神人) 양을나이다. 682년 중시조 양순이 신라에 들어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후 한라군(漢拏君)에 봉해지면서 본관이 된다.
함영훈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