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삼락구락부(三樂俱樂部)에 푹 빠져 있다. 걷기여행·미식기행·독서토론을 인생삼락으로 여기는 독서동호회다. 지난달 6일 조경달 교수가 쓴 ‘근대 조선과 일본’을 읽고 토론하던 중 소설가 K씨가 쓴 글을 인용하면서 격론이 벌어졌다. K씨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서구제국주의 침략군과 싸워 유일하게 이긴 싸움이다. 양헌수 유장이 거느린 미륵뫼총댕이 400여명이 올리비에 대령이 거느리고 온 법국 특공대 150명 가운데 140명을 몰살시켰다. 올리비에 대령도 사살했다.”과연 그럴까? 병인양요 정족산성 전투 그날로 다시 돌아가보자.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은 1866년 10월 11일 체푸(之 )를 출항한다. 군함 7척에 장병 1000명을 태우고 조선을 침략했다. 10월 16일 강화성을 점령한다. 전투는 없었다. 조선군은 모두 도망쳤다.

10월 17일 양헌수 천총은 양화진에서 출정길에 오른다. 10월 26일 문수산성에서 첫 전투가 벌어졌다. 투아르 대위가 분견대 120명을 인솔하고 문수산성을 공격했다. 한성근이 먼저 대포 2발을 쏘아 적 몇을 죽였다. 많은 적이 몰려들었다. 조선 포수 4명이 죽었다. 한성근과 포수들은 적에게 패해 도망쳤다. 적이 추격해왔다. 갑자기 안개가 산허리를 뒤덮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되자 프랑스군은 추격을 중지하고 철수했다. 11월 5일 양헌수 천총은 정족산성을 발견한다. 11월 7일 해진 뒤 강을 건너가기 위해 덕포나루 부래도에서 병졸을 헤아린다. 승선하라고 명령하니 소란이 일었다. 승선을 거부하는 오합지졸 향포수들에게 칼을 빼들고 일갈한다. “배를 타려니 겁나는가! 비겁한 병졸은 10만이라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 모두 가라. 내 장차 홀로 건너가겠다.” 승선하기 시작한다. 11월 8일 새벽 정족산성에 도착해서 다시 헤아린다. 18명이 총과 북을 버리고 도망가고 없다. 11월 9일 올리비에 대령은 육전대 160명을 이끌고 정족산성을 공격한다. 동문 포수 이완보가 적 1명을 명중시킨다. 매복하던 우리 군은 일제히 쏘기 시작한다. 산악이 진동한다. 동문과 남문에서 6명을 죽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탄환이 떨어졌다. 아군은 모두 실색했다. 양헌수 천총도 칼을 던지고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갑자기 적이 후퇴하기 시작한다. 프랑스 육전대는 그 와중에 약 70~80명이 죽었다. 물론 올리비에 대령은 죽지 않았다. 다음날 올리비에 대령은 로즈 제독에게 향포수 숫자를 “가장 훌륭한 정규군 2000명”이라고 보고한다. 패배를 합리화한 것이다.

나는 소설가 K씨에게 틀린 것을 지적하고 다시 질문했다. 답장이 왔다. “양헌수 장군은 문집 ‘하거집’ 가운데 출전일기에 정족산성 싸움을 자세히 기록했다. ‘한국사’에 나온 기록은 죄 왜인들 것을 보고 적은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극우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로 받드는 ‘조선말 하는 왜노들’이 역사학계를 틀어쥔 8·15 직후부터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양헌수 천총은 1866년 병인양요 59일 동안 ‘병인일기(丙寅日記)’를 쓴다. 1886년 73세로 유명을 달리하자 문집 ‘하거집(荷居集)’을 발간한다. 권1에 있는 격문 부록에 ‘출전일기(出戰日記)’라는 제목으로 병인일기를 싣는다. 출전일기에는 정족산성 전투에서 사망한 프랑스 군인 숫자를 늘려서 기록했다. “약 120~30명 죽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당연히 일기가 맞다. 20년 지난 다음에 발간한 것보다 20년 전 당시 기록이 맞고, 후손이 묶은 문집보다 본인이 기록한 일기가 맞다. 실증사학이라는 이름으로 극우 일본역사학자들이 저지른 역사왜곡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정밀해야 한다. 더욱 참돼야 한다. 역사는 소설이 아니다.

최석호 한국레저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