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 파평윤씨의 국방·호국정신
윤관 고토 회복, 간도는 늘 우리땅임을 증명
정유재란때 희생된 부인강씨 열부정려 하사
부모 잃은 아이들 키워낸 일꾼에 충노비 건립
윤은로는 청나라가 침략하자 안방준과 거병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고려때 여진(진국 발해의 후예)이 점유하던 고토(古土) 9성을 회복한 윤관(?~1111)은 우리의 땅, 동·서·북 간도가 거란 등에 의해 잠시 점유되었을 뿐 수천년 우리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위인이다. 점령은 했지만 자치권을 주었다.
윤관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수태보·문하시중, 감수국사에 올랐고 예종 묘정에 배향됐다. 공신에 오르고 영평현(파평) 개국백에 봉해지면서 윤씨의 본관이 이곳으로 정해졌다.
남도일보, 남도종가회에 따르면, 고려 개국공신인 윤신달(893~973)이 파평윤씨의 시조인데, 혜종 때 동경(경주) 대도독으로 부임해 30년간 중책을 맡았다. 윤관은 윤신달의 5세손이다.
6세 윤언이(1090~1149)는 문장으로 이름 높아 정당문학, 판형부사에 올랐고, 주역에 밝아 저서로 ‘역해’를 남겼다. 그의 아들 3형제가 과거 급제했다. 7세 윤인첨(1110~1176)은 벼슬이 중서시랑평장사, 수태사에 이르고 서경유수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해 광국공신, 감수국사에 올랐으며 명종 묘정에 배향됐다. 그의 아들 윤종악, 윤종함, 윤종양 삼형제도 과거 급제했다.
11세 윤보(1252~1329)는 충열왕 때 문과 급제해 성균관대사성, 서북면도지휘사를 거쳐 수첨의찬성사에 오르고 영평군에 봉해졌다. 그의 큰아들 윤계종(?~1346)은 충혜왕비 희비의 아버지로서 충정왕(고려 제30대 왕, 재위 1348~1351)의 외조부이고, 찬성사를 역임했다.
윤보의 둘째아들 윤안적(1269~1319)은 충정왕 때 과거급제하여 대언(승지와 같은 직책)을 역임하고 대언공파를 열었다.
15세 윤길(1368~1462)은 목은 이색에게 수학해 문과급제하고 한림학사를 역임한 고려말 문신이다. 충절을 지켜 조선 개국에 불참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계유정난 이후에는 사촌매제인 김종서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문이 원인이 돼 제주에 유배됐고 사면받아 돌아가는 길에 산자수려한 전라도 모평현에 터를 잡아 파평윤씨의 모평 세거가 시작됐다.
21세 윤형수(1521~1587)는 하서 김인후의 문인으로 참봉·선정관을 역임하고 임곡유고를 남겼다.
22세 윤해(1541~1597)와 신천강씨 부부는 정유재란 때 왜적의 칼에 희생됐는데 신천강씨가 남편을 해치려는 칼날을 두팔로 막아 잘려나가고 결국 부부 모두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이 사실은 조정에 알려졌고, 나중에 열부강씨정려 내려졌다.
부부의 어린 두 아들 윤성립, 윤정립(1594~1683)은 이 집안 일꾼 도생과 사월에 의해 길러졌다. 종가는 이들의 은덕을 기려 ‘충노비’를 세우고 제사를 지낸다.
24세 윤은로(1612~1686)는 병자호란이 나자 은봉 안방준과 의병을 일으켰다. 효자로 알려진 27세 윤동훈(1716~1770)이 대언공파 윤동훈종가를 열고 대대로 가학의 전통을 잇게 했다.
31세 윤자화(1825~1884)는 문과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을 거쳐 대사헌에 오르고 ‘귀영재유집’을 남겼다. 종가는 윤자화 과거급제 시권과 강서채점지(과목별 점수기록부)를 비롯한 유물들과 학문하며 영농했던 터전의 귀영재, 도천헌, 수벽사, 영양재 등 고건축물들을 보존하며 선조의 충절정신 계승에 힘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