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간의 거래는 신뢰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금융에서 신뢰란 ‘신뢰할 수 있는 제3기관’이 신뢰를 보증하는 제도적 장치로 담보된다. 금융시장에서는 금융회사가 이 역할을 담당한다.
그런데 금융상품이 복잡·다양화되면서 소비자들이 부담해야 하는 신뢰비용이 점차 증가하고, 금융회사는 갈수록 거대해졌다. 이에 금융회사와 소비자의 정보비대칭이 확대되면서 회사가 소비자를 기만하는 등의 ‘기울어진 운동장’ 구조가 형성됐다.
4차 산업혁명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인 블록체인이 등장한 배경도 현대사회의 신뢰 위기, 그리고 디지털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금융 시스템에서 불거진 신뢰 문제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등장한 블록체인 기술은 앞으로 금융시장 디지털 혁신의 중심에 설 것으로 예상된다. ‘스마트 계약’을 중심으로 금융의 다양한 영역에서 분산 애플리케이션이 활용된다면 현재 금융회사의 역할은 상당 부분 변경될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우리는 지난 세월 동안 금융회사를 ‘금융기관’이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정부의 통제를 받는 하나의 기관으로 보는 관치금융의 흔적이다. 그렇다 보니 정책에서 금융소비자 피해보다는 금융기관 건전성이 더 우선시됐고, 이런 상황은 금융회사와 금융소비자의 신뢰를 더욱 멀어지게 했다. 이에 지난달 시행된 ‘금융소비자보호법’은 금융회사의 책임을 강화해 금융소비자에 대한 신뢰 회복을 추구하고 있어 더욱 의미가 크다.
국내에서 금융소비자 보호 생태계는 3가지 축이 담당하고 있다. 먼저 업권을 종단(column)으로 구분하고 있는 ‘기존 금융회사’로, 이들은 지금 핀테크로 진화 중이다. 두 번째는 IT 기반의 금융 서비스를 횡단(row)으로 제공하는 ‘빅테크업체’로, 복합 금융 시스템을 구축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내고 있다. 나머지 한 축은 ‘금융 당국’이 담당한다.
소비자 보호 중심의 금융시장 생태계 조성을 위해 각 플레이어에게 요구되는 과제는 다음과 같다.
금융회사는 금융소비자보호법에 선제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핵심은 대고객 접점 인력의 자질 향상이다. 금융의 다양한 분야에 핀테크가 접목되고 있지만 금융소비자 피해는 테크의 영역이 아닌 고객 접점에 있는 ‘사람’에서 촉발된다. 회사의 우수한 인력들을 고객 접점에 배치하고 이들의 전문성과 윤리성 개발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빅테크업체는 소비자 보호에 디지털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역으로 디지털 금융 확산은 규제감독비용을 증가시키는 등 사회적 비용을 유발한다. 이에 디지털 금융으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된 금융 소외와 정보 격차 해소는 빅테크업체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금융소비자 보호 과제다.
금융시장 생태계에서 금융 당국의 역할은 무겁다. 금소법을 통해 금융소비자 피해 예방과 구제 기반을 마련했다. 이제는 소비자의 실제 금융생활을 지원하는 법안이 필요하다. 그중 하나가 재무설계와 재무설계사를 법률로 규정하는 것이다.
올 하반기에는 8월 마이데이터사업, 9월 금융상품자문업제도 등 새로운 비즈니스와 참여자들이 지속적으로 생겨날 것으로 예정돼 있다. 금소법과 같은 혼란을 재연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심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유럽연합의 개인정보이동권과 달리, 국내 마이데이터사업은 개인정보의 상품화를 촉진하는 것으로 변질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있다. 금융상품자문업이 금융상품 유형별 자격으로 운영돼 전문성 있는 자문 서비스 제공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지금부터 미리 살펴야 한다.
금융소비자 보호는 구호로 달성되지 않는다. 다양한 금융 생태계 참여자들의 역할과 책임에 맞는 유연하면서도 실효성 있는 세부 정책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김용환 법무법인 세종 고문·농협금융지주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