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 박현기 개인전 '아임 낫 어 스톤'

박현기, Untitled, 1983(2015년 재제작), 돌과 마이크, 스피커, 소리, 가변크기 [사진제공=갤러리현대]
박현기, Untitled, 1983(2015년 재제작), 돌과 마이크, 스피커, 소리, 가변크기 [사진제공=갤러리현대]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미친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똑같은 것을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사람이었지. 집요한 사람. 생각한 것은 끝내 이루고 마는 사람이었지" (신용덕 평론가)

'한국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박현기를 수식하는 단어는 '집요함'이다. 끝까지 파고 들어서 원하는 것을 쟁취하고 마는 사람. 예술가에겐 '벽'(癖)이 있다고 한다. 적당한 타협으로 탄생하는 건 작품이 아니라 제품이기에, 예술가들의 벽은 필수불가결일 것이다.

박현기가 추구했던 '벽'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전시가 서울 종로구 갤러리현대에서 열린다. '아임 낫 어 스톤'(I'm Not a Stone)이라는 제목의 전시엔 1978년부터 1997년까지 주요작 10여점이 나왔다. 강가의 돌을 전시장에 옮겨와 인간과 예술 그리고 자연의 관계를 시적으로 성찰한 '무제'(1983), 신체와 공간, 미술과 건축에 관해 풀어낸 장소 특정적 설치작품 '무제(ART)'(1986), 당시 최신 디지털 편집기술로 종교적 도상과 포르노그래피 영상을 이미지 조각하듯 짜깁기한 '만다라'(1997)등이 그 주인공이다.

박현기, Untitled, 1978(2015년 재제작), 돌과 레진, 가변크기 [사진제공=갤러리현대]
박현기, Untitled, 1978(2015년 재제작), 돌과 레진, 가변크기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전시는 백남준에 버금가는 미디어아트 작가로 기록된 박현기를 미디어아트에만 머물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특히 '돌'을 활용한 작업들은 작가의 작업세계를 관통하는 시각언어를 보여준다. 1978년 서울화랑 개인전에서 돌탑 작품을 처음 발표하는데, 이후 작가는 평생동안 돌을 작업의 주 재료로 활용했다. 오랜기간 하천을 굴러 둥글둥글 해진 돌과 합성수지로 만든 가짜 돌을 병치해, 자연과 인공, 진짜와 가짜, 물질과 비물질, 사물과 사물사이의 경계 등 상반된 개념들을 동시에 보여준다.

박현기에게 돌은 "태고의 시간과 공간을 표현하는 자연"이다. 한국 전쟁 당시 피난길에 마주한 서낭당 돌무더기와 그 돌에 소망을 비는 사람들의 행동은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돌무더기 풍경 자체가 작품이 되는 '무제'는 자연의 표상이자 하나의 주체가 된 돌들을 작품화 한 것이다. 돌들이 둥글게 앉아 도란도란 하는 이야기를 들으라는 듯, 마이크 하나가 설치됐다. 전시장에는 작품을 제작한 1983년 거리의 소음과 전시장을 오가는 2021년 관람객의 발소리가 동시에 울려퍼진다.

1983년 작가는 이 작품을 전시한 뒤 벌거벗고 퍼포먼스를 했다. 이번 전시에는 이 퍼포먼스를 사진으로 만날 수 있다. 작가는 등에는 '나는 돌이 아니다(I'm Not a Stone)' 가슴과 배에는 '돌과 돌 이외의 것(stone and so forth)'이라고 쓰고 돌을 들었다 놨다, 그 사이를 걸어다니며 돌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전달하려는 듯 다양한 몸짓을 한다. 갤러리현대 측은 "돌은 아니지만 돌 이외의 것인 작가가 돌로 표상되는 자연과 미술 전시장으로 표상되는 문명과 인간 사이 '전달자'로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돌은 이후 미디어아트에도 등장한다. TV를 돌위에 탑처럼 쌓고 이미지로 돌탑을 만든 것이다. 백남준이 1984년 위성으로 전 세계를 연결했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작품에 굉장한 충격을 받았던 박현기는 이후 미디어아트를 연구하기 시작하는데, 백남준이 영상을 화려하게 변주했다면 박현기는 정적인 이미지로 실제와 대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시작인 TV 돌탑 '무제'는 1988년 박현기가 일본 세이부 미술관에서 열린 그룹전 '일본과 한국 작가로 본 미술의 현재: 수평과 수직'에서 선보인 작품으로, 높이가 3미터가 넘는다. TV 돌탑 시리즈 중 가장 크다.

박현기, 만다라 시리즈, 1997-1988,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캔톡, 가변크기 [사진제공=갤러리현대]
박현기, 만다라 시리즈, 1997-1988, 싱글 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캔톡, 가변크기 [사진제공=갤러리현대]

하이라이트는 박현기 말년의 대표작 '만다라'다. 디지털 영상 편집기술이 도입되기 사작했던 1990년대 중반에 제작한 연작으로, 총 4점이 전시됐다. 붉은색 옷칠의 불교 의례용 헌화대 위에 투여된 영상은 포르노그래피, 만다라, 미륵의 그림, 불교 도상이 어지럽게 겹쳐지며 무한 반복한다. 구체적인 이미지는 사라지고 도상만이 잔상에 남는데 복잡함이 극으로 달해 오히려 미니멀해 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너무 일찍 떠나서 아쉽다" 오랜기간 박현기의 작업을 평론했던 신용덕의 말이다. 만약이라는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가장 최첨단의 기술을 활용한 작업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 한다. NFT를 활용한 영상 작품을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올해는 박현기의 21주기다. 전시는 5월 30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