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학도에서 대우重 재무·노무전문가 →통합법인 KAI 재무이사 →성동조선 CEO →KAI 사장 복귀…하성용 사장의 끝나지 않은 ‘인생 세옹지마’

‘인생 어찌될 지 알 수 없다’는 새옹지마(塞翁之馬) 고사가 있다. 살다보면 이 말이 떠오를 때가 가끔 있지만, 하성용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사장 처럼 ‘새옹지마’의 삶을 살아온 이도 보기 드물다. 어찌보면 우연에서 중요한 인생의 가치를 발견한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고나 할까?

하 사장이 기업인의 길을 택하게 된 것부터가 우연이다. 그는 원래 법학도로 법학자를 꿈꿨다. 그런데 그의 학업과 유학을 돕던 스승이 어느날 갑작스럽게 작고한다. 유학은 물론 학업까지 중단위기에 처한다. 결혼까지 앞둔 터라 주변의 걱정은 더욱 심해졌다.

“논문 하나 들고 집에 앉아있으니 참 처량하더라고요. 시골에 계신 어머니는 대학 석사까지 했으면서 왜 놀고 있느냐며 안타까워 하셨죠. 결혼 이야기도 나오던 터라 ‘일단 직업을 구했다는 것만이라도 보여주자’는 심정으로 기업 원서를 썼어요”

그런데 잠시 다니고 말자던 기업에서 무려 22년을 몸담게 된다. 사정은 이렇다. 입사 후 대우중공업에서 맡은 일은 재무 업무였다. 전혀 뜻밖이었지만 의외로 적성에 잘 맞았다. 전공이던 법과 마찬가지로 숫자 역시 논리가 중요하다는 점을 발견했다.

법학자가 됐더라도 꽤 많은 업적을 남겼을 지 모르지만, 우연으로 시작된 대우에서의 22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22년 동안 대우중공업은 기계에서 시작해 자동차, 배, 항공기 부품 등 모든 운송수단과 관련된 거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하 사장은 거의 모든 분야에 자금을 만들어주는 재무업무를 한 덕분에 여러 분야에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그런데 잘 나가던 재무 전문가에게 시련이 닥친다. 1998년 자금부장에서 이사로 승진해 1년쯤 지나 이제 ‘재무를 평생 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다. 당시 최고경영자는 그에게 느닷없이 인사, 노사 업무를 맡으라고 지시한다. 근무지도 서울에서 인천공장(현 두산인프라코어 본사)으로 바뀌었다.

당시 대우그룹 전체가 위기의 시기를 맞이하면서 대우중공업 노사는 녹록치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노련한 노사전문가도 힘들어하던 때다. 그는 당시를 “요즘 말로 정말 ‘멘붕’이었다”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하 사장은 정공법을 택했다. 꼼꼼하게 직원 명단을 외우기 시작했고, 노조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술이 센 편이 아니지만 노조원들의 술자리에도 참여해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3~4잔을 연거푸 마셨다. 힘들었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멀쩡한 척 출근했다.

“얕잡아보던 노조원들이 ‘하 이사 고생 좀 하겠다’ 싶었는데 자기들보다 내가 먼저 출근해 있으니 깜짝 놀라더라고요. 일종의 기 싸움이었죠. 그렇게 친해졌어요. 그분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계기가 됐고, 어떻게 대화를 해야하는 지도 배웠죠”

2년 간 몸으로 부딪히며 익힌 인사ㆍ노사업무는 CEO가 된 지금의 그에게는 큰 자산으로 남았다. “사람과 조직의 융화, 또 그것이 기업의 성장과 맞물려 가야한다”는 그의 지론도 이 때 만들어졌다.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노무담당 하 이사의 임무도 끝이 난다. 새 직장은 1999년 통합 출범한 KAI였다. 대우중공업, 삼성항공, 현대우주항공 등 당시 항공3사의 과당 경쟁으로 항공 산업이 고사위기에 처하자 3사 ‘빅딜’을 통해 만들어진 항공부문 통합법인이다. 하 사장은 대우중공업을 대표해 통합 법인에 합류한다. 재무, 인사 등 주요업무를 두루 거쳤고 대우중공업 시절 사천2공장 건설 자금 마련 업무를 담당하며 항공 산업과 연관이 있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관리의 삼성’ 출신 인사를 제치고 통합법인의 핵심보직인 재무이사를 맡았다. 이쯤 되면 괜찮다 싶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 자리는 고난의 자리였다. 회사가 부실자산만 많고 정작 쓸 돈은 없었다. 주주들은 투자를 꺼려했다. 재무담당 하 이사는 돈을 빌리기 위해 매일 시중 은행을 돌아다녀야 했다.

“법인 출범 후 직후에 보유하고 있던 현금이 6000만원 정도였습니다. 돈을 빌리기 위해 정말 신발 바닥이 다 닳도록 은행을 다녔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니다보니 마치 홍길동이라도 된 기분이더군요”

그가 돈을 빌리러 다니던 모습은 당시 금융권 관계자들에게 큰 인상을 줬다. 훗날 성동조선해양 사장으로 추천된 배경에도 이때의 모습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업계의 이야기다.

하지만 노력의 결실은 그리 달지 않았다. 훈련기 개발 등을 위한 장기 투자가 필수적이었지만 금융 지원은 적고 수익은 나지 않으니 차입금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외자 유치도 실패한다. 결국 2005년, ‘이렇게 가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자성이 터져 나왔고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재무이사로 사실상 구조조정 업무를 총괄했던 하 사장은 “뼈를 깎는” 심정으로 임했다. 부실자산 매각, 적자사업 조기종료 등 만성적인 부실 요인들을 제거했다. 효과는 있었다 800%대를 넘어서던 부채비율이 100%대로 뚝 떨어졌고 은행 이자 비용도 100억 원 미만으로 정리됐다.

재무 구조가 점차 개선되고 2009년부터 T-50이 양산단계에 들어가 수출이 이뤄지며 사업이 확장되기 시작했다. 2009년, 출범 이후 처음으로 매출이 1조원을 넘어섰다.

2011년 3월 최고재무책임자(CFO)로 기업공개(IPO)를 준비하던 그는 뜻하지 않게 회사를 떠난다. 수많은 위기를 넘기며 이제 막 결실을 보려던 찰나, 회사를 그만 두게 된 것이다.

“지금이야 몇 달 잘 놀았다며 웃을 수 있지만 당시에는 힘들게 키운 자녀를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처럼 아쉬움이 컸다”고 기억했다.

이번에도 뜻하지 않는 백수 생활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다. 백수생활을 석 달 여쯤 하던 중 워크아웃 중이던 성동조선해양의 총괄 사장을 맡게 된다. 생애 첫 최고경영자(CEO) 임무다.

그런데 워크아웃 기업의 CEO는 평소 생각하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스스로도 “마음 편히 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할 만큼 성동조선해양 사장으로 재직했던 약 2년의 시간은 녹록치 않았다.

“취임식을 하러 갔는데 8000명 정도의 직원이 내 눈을 쳐다보더군요. 그 중 내가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CEO도 처음이고 그 회사도 처음이었으니. 그 많은 사람들이 ‘저 사람이 뭘 할 수 있을까’라는 눈빛으로 저를 보는데 솔직히 겁이 났어요”

조선업은 대우중공업도 영위하던 사업이었다. KAI에서는 위기에 빠진 기업을 회생시켜봤다. 경험을 바탕으로 차근차근 망가진 내부 경영시스템을 복구하며 기본부터 바로잡아 나갔다.

채권단의 관리를 받고 있었지만 직원복지 개선, 성과보상 지급, 협력업체 관리 강화 등의 경영 원칙을 정했다. 경영 환경이 어려워도 근로자들을 잘 다독이고 보상을 철저히 진행하고, 협력업체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함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채권단이 우려했지만 “(이 때문에) 회사가 어려워지면 내가 책임지겠다”고 못을 박기도 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던 직원들도 결국에는 하 사장의 뜻을 지지했다.

성동조선해양의 정상화 틀이 어느정도 잡혔을 때 2013년 KAI 사장으로 추천됐다. 정관계 출신이 맡던 관례를 깨고 KAI 출신 첫 전문경영인 사장이다. 2년여만의 친정 복귀였다.

KAI의 CEO로 보낸 지난 1년 5개월은 하 사장에게 보람의 시간이다. “이런 날도 있구나”싶을 정도로 출범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많은 성과를 냈다. 취임 직후인 지난 해 창립 이래 최초로 매출 2조원을 돌파했고, 올 해도 상반기에만 매출 1조1000억원을 달성했다. 영업이익은 748억원으로 지난 해 같은 기간 대비 113.5% 증가했다. 인도네시아, 터키, 페루, 이라크 등과 체결한 국산항공기 수출계약 규모만 약 22억 달러에 달한다.

하지만 수없이 새옹지마의 굴곡을 겪었던 하 사장은 지금의 달콤한 성과에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직원들에게 “미래를 대비하라”고 거듭 강조한다. 특히 “T-50은 이미 흘러간 비행기다. 끊임없이 기술을 개발하라”는 냉정한 말도 아끼지 않는다.

사천공장에서 직원들과 아침밥을 함께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하 사장이다. 직원들을 만날 때면 그의 얼굴에는 눈꼬리가 아래로 살짝 내려가는 아빠 미소가 가득하다. 미래에 대한 열정이 뜨거운 현장 직원들이야말로 진정한 회사의 최고 자산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조선산업이 왜 세계 1위인줄 아세요? 현대, 삼성, 대우가 끊임 없이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1~3위 기업이면 이젠 기술 개발 안해도 될 것 같은데 계속 신기술을 개발하고 있죠. 서로 경쟁을 하면서 경쟁력을 키우는 겁니다. KAI는 함께 경쟁하고 벤치마킹할 기업이 아직 국내에 없습니다. 끊임 없는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솥 안에 갇힌 개구리가 온도를 높일 때 안주하면 결국 죽게되는 것처럼, 우리도 만족감에 젖어있으면 후발업체에 추월 당하고 도태되고 맙니다”

하성용 사장의 인생 발자취

▷1951년10월 경북 영천 출생 ▷1974년 고려대 법학과 학사 ▷1977년 고려대 대학원 법학과 석사 ▷1978년 대우그룹 공채 입사 ▷1997년 대우중공업 재무담당 이사부장 ▷1998년 대우중공업 인사 노사 총무담당 이사부장▷1999년 한국항공우주산업 재무실장 이사 ▷2002년 한국항공우주산업 재무실장 상무 ▷2005년 한국항공우주산업 경영지원본부장 전무 ▷2010년 한국항공우주산업 부사장 ▷2011년 8월 성동조선해양 대표이사 사장 ▷2013년 5월~ 한국항공우주산업 대표이사 사장

대담=홍길용 재계팀장/정리=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