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테레비를 추억하다/정범준 지음/알렙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정서적으로는 여배우 정윤희에 열광했던 세대를 기리는 추억담이다. 역사적으로는 ‘흑백테레비시대’를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문화사적으로는 ‘한류’라고 부르는 한국 대중문화의 전성기의 ‘전사’(前史)다. 동시대로 보자면 ‘서태지세대’의 원초적 문화경험에 대한 복기다. ‘흑백테레비’라고 부르는 문화적 표상 이면에 흐르며 책을 감싸고 도는 따뜻한 온도는 흑백테레비를 보며 ‘가난한 노동’과 고달픈 삶을 위안했던 모든 이름없는 부모들에 대한 헌사의 정이다.
논픽션 작가 정범준(44)의 새 책 ‘흑백테레비를 추억하다’(알렙)가 최근 출간됐다. 작가 정범준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후손들의 삶을 추적한 ‘제국의 후예들’과 관훈클럽의 비사를 통해 한국 언론사를 짚은 ‘이야기 관훈클럽’, 전설적인 투수 최동원의 평전 ‘거인의 추억’, 소설가 이병주의 생애를 좇은 ‘작가의 탄생’, 저자 자신을 포함해 사회인야구에서 뛰는 이들의 사연을담아낸 ‘마흔, 마운드에 서다’ 등을 통해 방대한 자료와 날 것의 현실을 꿰어내는 농밀한 필력을 보여줬다.
한국 TV 방송의 탄생과 60~80년대에 이르는 흑백TV시대의 면면을 담아낸 새 책의 발단은 전작 ‘거인의 추억’을 위한 취재중 저자가 우연히 접한 옛 TV편성표였다. 저자는 최동원 관련 자료를 모으던 중 야구 중계 방송 여부를 확인하고자 옛 신문을 뒤적였다.
“TV편성표에서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반가운 제목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장르별로 하나씩만 나열해 봐도 이렇게 많다. <달려라 번개호>라는 만화영화, <호돌이와 토순이>라는 어린이 대상 프로그램, <600만불의 사나이>라는 외화, <결혼행진곡>이라는 주말연속극, <쇼쇼쇼>라는 쇼 프로그램, <고전 유머극장>이라는 코미디 프로그램, <장수만세>라는 노인 대상 프로그램, <달동네>라는 일일 연속극이 그것이다.”
“세계를 주름잡는 용감한 번개호~”, ‘어린이 사회자’ 최유리ㆍ윤유선, ‘둔 둔 둔 둔’ 하며 달리던 스티브(리 메이저스 분), ‘안녕하십니까? 후라이보이 곽규석입니다’로 시작되던 ‘쇼 쇼 쇼’…. 어디 이 제목들로 추억 한 자락 없고 노래 한 마디 떠올리지 않을 3040, 7080세대가 있을까. TV편성표는 저자를 70년대 초중반의 유년시절, 금성의 17인치 ’테레비’를 처음 만났고 어머니 곁에서 보던 TV와 만화 주제곡을 흥얼거리던 때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했다. 여기에 그쳤다면 잠시 빠져본 개인의 추억이었을테지만, 저자는 작가로서의 호기심과 인내심으로 당시 기억의 조각들을 수천여개의 TV편성표와 퍼즐 맞추듯 꿰어간다. 당시의 신문기사와 직접 만난 인사들의 증언을 더해 저자는 한국 최초의 TV 방송국 KORCAD가 첫 전파를 쏘아올린 5월 12일(시험방송)로부터, 80년 11월 30일, 그러니까 컬러방송 시작을 하루 앞두고 TBC가 문을 닫는 마지막날까지를 날짜 하루, 시간 몇 분까지도 꼼꼼히 따져가며 기록했다.
‘팩트’를 확인하다 보니 뜻밖의 수확도 있었다. 기존의 저서들 대부분이 KORCDAD의 공식 개국일을 1956년 6월 1일로 적고 있으나, 저자는 당시 자료를 통해 6월 16일이었음을 확인했다. 한국의 첫 TV드라마도 자료나 기사, 증언마다 ‘천국의 문’과 ‘사형수’로 엇갈리나, 저자의 확인 결과 1956년 8월 2일 방영한 ‘용사’(‘사형수’의 원제)였다. 기존 TV방송사를 수정해야 될 대목이다. 최초의 스포츠중계방송도 1957년 6월 9일 방영된 ‘전국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권대회 결승전 실황 중계’였다는 사실도 아울러 추정했다.
정규방송 개시일인 6월 16일엔 이미 ‘바라에티’라고 부르던 버라이어티쇼도 방영됐는데, ‘노래파-티’라는 프로그램으로, ‘OB 제공’으로 돼 있다. 즉 OB맥주는 한국 TV방송 첫 스폰서였던 것이다. 또 이 프로그램에선 악극인 윤부길이 메인 무대를 장식하기도 했는데, 이 때 12살이었던 그의 딸도 나와 노래를 불렀다. 이 소녀가 윤복희다. 미국에서 방송설비를 가져오고 인력까지 수입해 만든 KORCAD는 1년만에 짧은 생을 마감했으나, 이미 이 때 이낙훈, 이순재 등의 배우들이 활약했으며, 깁희갑, 배삼룡, 구봉서, 서영춘 등의 이름도 보였다.
이후 KORCAD는 경영난으로 사주가 바뀌어 DBC로 간판이 갈고 1961년까지 전파를 송출하였으나 5.16쿠데타 이후 채널 9를 국영TV에 넘기면서 문을 닫는다. 그 뒤를 이은 민간방송사가 1964년 개국한 TBC. ‘흑백테레비를 추억하다’는 TBC의 방송 프로그램 중심으로 당대의 스타와 방송산업, 방송가의 풍경, KBS 및 MBC와의 경쟁 등을 기술해간다.
KORCAD의 설립자인 황태영으로부터 시작하는 ‘흑백테레비를 추억하다’는 인물을 통해 방송을 보고, 프로그램을 통해 시대의 풍경을 묘사하며, 이를 통해 동시대 삶의 이야기를 추억한다. 철저히 ‘사실’과 ‘증언’, ‘자료’에 입각해 있지만, 어느 누가 옛 앨범의 사진을 추억 없이 넘길 수 있을까. 저자 역시 스타들의 이름과 프로그램, 사진, 기사, 인터뷰를 자신의 추억담과 곁들여 불러낸다. 그 정점에는 ‘정윤희 누나, 한진희 아저씨’로 상징되는 한국 대중문화사의 한 페이지가 있다. 누구에겐 옛 앨범 속 사진이겠지만 어떤 이에겐 민속사연구, 누구에겐 한국 미디어사 자료로도 손색없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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