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비밀 등 비공개자료열람의 신청 및 절차에 관한 규정(가칭)' 마련
기존에는 영업비밀, 자진신고 자료는 공개 불가
미국 기업들 반발 극심…“장기적으로 가야 할 방향”
[헤럴드경제=정경수 기자] 기업들이 공정거래위원회와 자신들의 혐의를 두고 다툴 때 자료를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이 더 강해질 전망이다.
7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공정거래위원회는 연내 '영업비밀 등 비공개자료열람의 신청 및 절차에 관한 규정(가칭)'을 마련한다. 현재 외부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 관련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당초 이러한 내용을 공정거래법 전면 개정안에 담았었다. 하지만 국회 통과가 요원해지자 법을 바꾸지 않고도 제도를 개선할 방안을 찾게 됐다.
규정이 마련되면 피심인(피고 격) 측인 기업은 공정위에 조사 과정에서 확보한 증거자료를 폭넓게 요청할 수 있게 된다. 심지어 제3자 기업의 영업비밀 등도 제한적으로 볼 수 있다. 기업의 방어권이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기업 측 대리인을 맡은 변호사가 공정위 내 비공개자료열람실(가칭)에서 영업비밀 등을 제한적으로 열람하는 방식이 유력하다. 이때 변호사는 비밀유지서약서를 작성해야 한다.
현재까지는 기업들이 요청하더라도 영업비밀, 자진신고 등에 해당하는 증거자료는 제공하지 않았다.
다만 어떤 자료를 영업비밀로 볼 수 있을지, 자료를 열람한 후 어떤 식으로 복사해 줄 수 있을지 등에 대한 고민이 남았다. 특히 열람·복사 방식에 대해선 현장에서 필기 만을 허용하거나 민감한 부분을 지운 후 복사해주는 방법 등을 검토 중이다.
기업 측의 증거자료 제출 요구로 전원회의 심의가 길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해결해야 할 과제다. 제3자 기업 측은 영업비밀이 넘어갈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공정위 조사에 소극적으로 응할 가능성도 해결해야 한다.
미국 측 압박이 이번 규정 마련에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공정위가 지난 2016년 말 퀄컴의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행위에 대해 역대 최대의 1조원 과징금을 부과했다. 이때 퀄컴은 방어권을 충분히 보장받지 못한 만큼 공정위 심결이 부당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료를 공개하라는 행정소송도 제기했었다.
거래상 지위 남용(갑질) 혐의를 받고 있는 애플코리아도 마찬가지로 자료를 공개하라고 요구했었다. 그러나 공정위는 SK텔레콤 등 통신3사에 대한 영업비밀이 담겨 있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미국 정부가 나섰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해 3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이후 7년 만에 경쟁분야에 대한 첫 양자 협의를 열자고 요구했다. 공정위가 보유한 증거자료를 열람할 수 있도록 허용하라는 주장이었다. 공정위는 이러한 요구를 일부 받아들이기 위해 이번 규정을 마련하게 됐다.
물론 공정위 내부서도 기업의 방어권 확대가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공정위 관계자는 "피심인의 절차적 권리를 보장하고, 공정위 심의의 절차적 엄밀성을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며 "현실적으로도 절차적 권리를 무시했을 땐 법원 소송에서 패소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외부서도 공정위도 세계적인 추세에 맞춰가야 한다는 의견이다. 정양훈 법무법인 바른 파트너 변호사는 "공정위 조사 대상에 외국기업이 많아지고 있다. 외국 기업 입장에선 글로벌 기준에 맞게 증거자료 등을 교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할 말이 없을 수 밖에 없다"며 "장기적으로 가야할 방향이고 기업들이 충분히 방어할 수 있게 자료를 공유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간 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취지는 좋지만 실제적으로 어떤 자료까지 공개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앞으로 명문화된 규정을 바탕으로 한 증거자료 열람·복사 다툼이 더 심화될 것"이라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