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2월, 미국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22살의 흑인 헤비급 복싱 세계 챔피언이 나왔다. 그는 난공불락으로 불리던 WBAㆍWBC 세계 헤비급 통합 챔피언 소니 리스턴에게 TKO 승리를 거뒀다. 새 챔피언은 얼마 후 놀라운 기자회견으로 충격을 던졌다. “나는 알라를 믿고 평화를 믿습니다. 백인 동네로 이사할 생각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스포츠 분야 챔피언은 흑인이 주류로 편입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길이었다. 그런데 새 흑인 챔피언은 ‘반(反)백인’을 외쳤다.

흑인 민권운동가이자 복서였던 무하마드 알리의 이야기다. 알리는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링 안에서는 숱한 도전자들과 싸우며 ‘세계 최고의 복서’로 이름을 알렸고, 링 밖에서는 민권운동가로 평생을 ‘불평등’과 싸웠다. 미국 기성사회를 향해서는 꾸준히 쓴소리를 날렸다.

얼마전 한국에서도 한 챔피언의 충격 발언이 주목을 받았다. 2014년 소치와 2018년 평창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쇼트트랙 챔피언 심석희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함께 했던 조재범 코치에게 수차례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한국 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강력했다. 남성중심적인 체육계에서 여성은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체육계는 지연 학연은 물론 온정주의와 파벌이 강하다. ‘우리가 남이가’란 인식은 제 식구의 잘못에는 관대한 처분을 내리는 배경이다. 심석희의 폭로를 접한 스승 전명규 한국체육대학교 교수(전 대한빙상연맹 부회장)는 구속된 조재범을 두고 “구속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생각했다”고 발언했다. 이 생각은 비단 전명규 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심석희는 이런 환경을 이겨냈다. 자신의 신분 공개를 감수하고 조재범의 그릇된 행위를 세상에 알렸다. 파급력은 상당했다. 체육계 피해자들의 추가 폭로가 계속됐다. 지난해 2018 자카르타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던 세팍타크로 국가대표 최지나 선수가 고등학교 시절 감독 양모 씨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젊은 빙상인 연맹’은 빙상계 성범죄가 심석희의 경우를 포함해 6건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여론은 빙상연맹과 체육계를 겨냥한다. 특히 파벌과 강한 군기, 수차례 비위 은폐 논란으로 물들었던 빙상계에 대한 비판은 유독 거세다.

심석희 고향 강릉 현수막 물결.  [연합뉴스]
심석희 고향 강릉 현수막 물결. [연합뉴스]

변화는 찾아오고 있다. 대한체육회는 빙상연맹을 체육회에서 제명시킬 수 있다고 밝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진상 규명을 위해서 대한체육회와 장애인체육회를 대상으로 선수단 내 전수조사를 실시하겠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달아오른 여론은 식기 마련이다. 그럴 경우 체육계 병폐가 다시 수면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란 걱정도 든다. 심석희의 용기 있는 폭로가 묻힐 수도 있다는 우려다.

실제로 지난 21일 국회 정론관에서 ‘젊은 빙상인 연대’의 성범죄 피해자 추가폭로 기자회견은 함께 연단에 선 손혜원 의원의 다른 이슈에 묻혔다. 손 의원이 목포에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는 가운데, 이날 국회정론관에 모인 기자들은 기자회견 내용보다, 회견자 손혜원 의원에 집중한 것이다.

다시 알리. 알리는 1967년 베트남 전쟁에 징집을 거부하며 링에서 추방됐다. 5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여파로 3년 6개월 동안 링 위에 오르지 못했다. 미-소간 경쟁이 격화됐고 그 속에서 ‘자유진영의 축소’가 우려됐던 그 당시, 미국 기성사회는 징집을 거부한 알리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알리는 힘겹게 투쟁했다. 결국 반전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여론이 호전된 뒤에야 알리는 링위에 다시 설 수 있었다.

지난해 우리는 ‘미투’가 어떻게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는 지를 봤다. 폭로가 이어질 때 불같던 여론은, 금세 시들었다. 체육계 병폐 해결을 위해서 이번만큼은 그렇게 끝나선 안된다. 이슈의 힘은 무섭다. 여론의 날선 시선이 계속 유지되길 바란다.

김성우 사회섹션 사회팀 z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