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과비자(안나 체거스 지음, 이재황 옮김, 창비)
“죽음이 어느새 여전히 건재한 펄럭거리는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들고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 바짝 따라붙었다. 아마도 나는 죽음을 마주친 적이 있고 앞지른 적이 있어서 그랬는지 죽음 자신도 도주 중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누가 죽음을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97쪽)
“틀림없이 나는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중요한 것을 보기 위해서는 남아 있으려고 해야 한다. 모든 도시는 단지 통과하기 위해서만 그 도시들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조심조심 그물을 뛰어넘어갔다. 하루를 여는 첫번째 가게들의 문이 열렸고, 첫번째 신문팔이 소년들이 소리를 질러댔다.”(370쪽)
모든 망명자들을 떠남을, 도주를 희망한다. ‘통과비자’의 화자 ‘나’는 유럽을 뒤덮은 제 2차 세계대전의 파시즘을 피해 망명자들의 대열에 끊임없이 휩쓸린다. 그러나 반복적이고 강박적인, 그래서 의미와 목표조차 잃어버린 여정의 어느 순간, 예기치 못한 발견에 이른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신문팔이 소년, 벨상스의 어부 부인들, 가게 문을 여는 여자 상인들, 아침근무를 하러 출근길에 오른 노동자들, 그들은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결코 떠나지 않을 무리에 속했다. 그들이 떠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나무나 “풀덤불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370쪽)
제 2차 대전 망명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통과비자’의 서사는 맹목적이고 강박적인 탈출 열망을 가진 망명자들의 세계와, “머물기 위해”(210쪽) 온 사람들의 도시, 평범한 삶이 지속되는 곳, 역사의 굴곡에도 제 삶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자들의 세계 사이에걸쳐져 있다.
2차대전 반파시즘 망명문학의 상징이자 동독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는 안나 제거스(1900~1983년)의 대표작 ‘통과비자’가 국내 초역 출간(20일자)됐다.
안나 제거스는 독일 마인츠에서 미술품상을 하는 유대인 가정의 외동딸로 태어나 정통 유대교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으며 하이델베르크 대학과 쾰른 대학에서 미술사, 역사, 중국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대부터 유대인 지식인이자 공산당원, 반전주의자, 작가로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193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뒤 프랑스를 시작으로 벨기에, 스위스, 미국, 멕시코 등으로 이어지는 망명생활을 14년간 지속했다. 망명 중에 남편이 수용소에 갇히고 어머니가 아우슈비츠에서 목숨을 잃는 등 개인적 곡절을 겪으면서도 반파시스트로서 작가로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줬다. ‘제7의 십자가’ ‘통과비자’ ‘젊은 자는 영원히 젊다’ 등을 펴내며 망명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으며, 특히 ‘통과비자’는 개인적 체험과 당대의 역사를 탁월하게 결합한 대표작으로 꼽힌다.
2차 대전 파시즘의 물결이 뒤덮은 유럽에서 독일 강제수용소를 탈출한 화자 ‘나’가 파리와 마르세유에서 만나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하인리히 뵐은 “제거스가 쓴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평했으며, 뉴욕타임스는 “어떤 독자도 망명자들의 정신세계를 해부하는 작가의 성실한 고투에 의문을 품을 수 없을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