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벽돌 구사옥서 일군 100년 헤리티지
국산 31호 신약 렉라자, 美·中·日 글로벌 안착
급여 전 330억 무상 공급…故유일한 정신 계승
올해 상반기 연결 매출 1조1662억 돌파
R&D 1조 선순환 안착…‘넥스트 렉라자’ 가속
[헤럴드경제=최은지 기자] 서울 동작구 대방동, 도심 빌딩 숲 한가운데 자리 잡은 붉은 벽돌 건물 ‘윌로우하우스(Willow House)’가 남다른 무게감을 드러낸다. 1962년부터 35년간 유한양행의 본산 역할을 했던 구사옥을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아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곳이다.
유한양행은 과거를 무작정 철거하는 손쉬운 재건축 대신, 1961년 유한공업고등학교 설립 당시 교직원과 학생들이 직접 쌓아 올렸던 붉은 벽돌을 하나하나 재사용해 외벽에 다시 쌓아 올렸다. 지나온 1세기 역사의 터전 위에 100년의 헤리티지를 물리적으로 고스란히 보존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 공간에서 잇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야외 정원 ‘윌로우파크’에는 창립자 고(故) 유일한 박사의 사저에 있던 조경 석탑과 함께 50년 뒤인 2076년 개봉할 100주년 기념 타임캡슐이 깊숙이 묻혔다. 유 박사는 널리 알려진 성공한 기업인이기 이전에, 일제강점기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미 전략사무국(OSS)의 극비 대일 침투작전 ‘냅코(NAPKO) 프로젝트’에 50세의 나이로 자원했던 1조 조장이자 최정예 특수공작원 ‘암호명 A’였다.
오직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투철한 애국심 하나로 생사를 넘나들었던 그의 독립투쟁 정신은 고스란히 기업 경영의 단단한 뿌리가 됐다. 옛 구사옥 터에 깊게 뿌리내린 이 붉은 벽돌 공간은 일제강점기 ‘암호명 A’가 애국애족으로 싹을 틔운 민족 기업의 유산이 어떻게 100년의 세월을 관통해 글로벌 혁신 신약의 산실로 진화했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덕원빌딩서 싹튼 민족 기업…종업원 지주제와 전문경영 1호
유한양행의 출발은 단순한 영리 기업의 창업이 아니었다. 1926년 12월, 서울 종로 덕원빌딩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수입 의약품을 소분해 판매하며 내딛은 첫걸음은 일제의 수탈 속에서 신음하던 동포들에게 양질의 보건의료를 보급하겠다는 구국의 결단이었다.
‘유한양행(柳韓洋行)’이라는 사명 자체에도 민족혼이 오롯이 녹아있다. 유일한 박사는 국권을 빼앗긴 타국에서도 한국인임을 잊지 않기 위해 이름 끝에 ‘한(韓)’을 새겨 넣었다. 여기에 창립 동료들이 성씨인 ‘버들 유(柳)’와 결합해 ‘유한’으로 부르기로 뜻을 모았다. ‘양행(洋行)’은 특정 업종에 얽매이지 않고 농촌에 필요한 염료와 농기구, 자동차, 치약, 화장품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삶에 필요한 일들을 세계를 무대로 넓게 펼치겠다는 개척 정신을 담았다. 상징인 ‘버드나무’ 로고 역시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번성해 민족의 든든한 그늘이 되어주라는 서재필 박사의 염원에서 출발했다.
유한양행은 수입약 공급에 안주하지 않고 자주적 생산 인프라를 빠르게 다져나갔다. 1933년 탄생한 자체 개발 1호 의약품 ‘안티푸라민’은 녹색 철제 캔 연고로 출발해 9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연간 수백억 원대 매출을 올리는 국가대표 상비약으로 활약하고 있다. 1936년에는 경기도 부천에 소사공장을 완공하며 근대적 제약 제형 설비를 갖췄다.
경영 방식도 선구적이었다. 1936년 개인기업을 주식회사로 전환하며 국내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공로주 분배)’를 시행해 기업경영사에 거대한 이정표를 세웠다. 해방과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부산 임시공장에서 군용 의약품을 생산했고, 전후 폐허가 된 소사공장을 재건해 국내 최초로 항생물질제제 생산에 성공했다.
1962년에는 국내 제약업계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1969년에는 창업주 일가가 경영권을 완전히 내려놓고 평사원 출신 사장을 선임하는 등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선진 전문경영인 제도를 도입했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집계 기준 국내에서 창립 100주년을 맞은 상장기업은 유한양행이 11번째다.
1971년 76세로 타계하며 공개된 유 박사의 친필 유언장은 또 한 번 한국 사회에 큰 울림을 안겼다. 손녀의 학자금을 제외한 전 재산을 공익법인 유한재단에 기부하며 ‘기업은 영속적인 사회의 소유’라는 숭고한 기업가 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했다.
K-바이오 역사 바꾼 오픈 이노베이션…‘5분의 기적’과 330억 환원
유한양행의 100년사에서 가장 찬란한 성과는 단연 ‘렉라자’다. 렉라자의 신화는 국내 제약·바이오 산업의 패러다임을 ‘복제약(제네릭) 중심’에서 ‘글로벌 혁신 신약’으로 송두리째 바꾼 기념비적 사건이다. 그 중심에는 국내 제약업계 최초로 성공 모델을 정립한 ‘오픈 이노베이션(개방형 혁신)’ 전략이 있었다.
유한양행은 전임상 직전 단계의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후보물질인 레이저티닙(현 렉라자)을 과감히 도입했다. 내부 R&D 역량을 결합해 물질의 효능과 가치를 극대화한 뒤, 2018년 글로벌 빅파마 얀센(J&J)에 총 12억5500만달러 규모로 기술수출하는 대형 딜을 성사시켰다.
‘벤처 발굴→유한양행 가치 제고→빅파마 글로벌 임상 및 상업화’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는 대한민국 신약 개발의 표준 교과서가 됐다. 1994년 간장질환 신약 YH439의 일본 수출로 씨앗을 뿌린 지 30년 만인 2024년 8월, 렉라자와 J&J ‘리브리반트’ 병용요법은 마침내 미국 FDA 승인을 획득했다. 국내 제약사가 개발한 항암제가 미국 FDA 1차 치료제 승인을 따낸 사상 첫 쾌거다.
글로벌 영토 확장도 가파르다. 파트너 약물인 리브리반트 피하주사(SC) 제형이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등 세계 주요 의약품 시장의 문턱을 모두 넘어섰기 때문이다. 정맥주사(IV) 투약에 무려 6시간이 소요되던 고통스러운 치료 시간을 단 5분 내외로 줄여 환자의 삶의 질과 의료진의 투약 편의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여기에 미국종합암네트워크(NCCN) 가이드라인 ‘카테고리 1’ 최선호 요법 등재와 미국 내 처방 보조를 이끄는 J코드 획득이 맞물리며 처방 점유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J&J는 이 병용요법의 연간 최대 글로벌 매출을 50억달러(약 7조원) 이상으로 내다보고 있다.
수익 앞에서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잊지 않았다. 유한양행은 렉라자가 국내 1차 치료제로 건강보험 급여를 적용받기 전인 2023년 7월부터 6개월간 ‘조기공급 프로그램(EAP)’을 가동했다. 약값이 부담스러운 전국의 말기 암 환자들을 위해 인원 제한 없이 무상 공급을 단행한 것이다. 총 895명의 폐암 환자가 생명의 기회를 얻었으며, 당시 약가 기준으로 환산한 지원 규모만 330억원에 달한다.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환원한다’는 창업 정신이 렉라자를 통해 실체화된 순간이다.
유한양행은 렉라자 기술수출로 거둔 결실을 곳간에 쌓아두는 대신 과감한 미래 R&D에 쏟아붓는 선순환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최근 5년간 투입된 연구개발비만 1조원을 넘어섰다. 올해 상반기에만 별도 매출의 10.5%(1175억9800만원)를 R&D 비용으로 투입했다. 단기 실적 부양을 위한 비용 통제 대신, 벌어들인 자본을 다시 ‘제2, 제3의 렉라자’ 발굴에 실탄으로 투입하는 K-바이오 오픈 이노베이션의 표준 공식을 완벽히 정착시켰다는 평가다.
올 2분기 영업익 34% 껑충…오창·오송·화성 대규모 증설
신약의 글로벌 상업화는 유한양행의 재무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2026년 상반기 누적 연결 매출은 1조1662억원, 누적 영업이익은 756억원을 달성하며 역대 최대 실적 흐름을 확고히 했다. 호실적을 견인한 쌍두마차는 폭발적인 라이선스 수익과 원료의약품(API) 수출이다. 별도 기준 2분기 라이선스 수익은 589억원으로 전년 동기(255억원) 대비 130.6% 폭증했다. 렉라자 병용요법의 유럽 상업화 개시에 따른 마일스톤 3000만달러(약 430억원)가 일시에 유입되고, 글로벌 처방 확대에 따른 런닝 로열티가 본격 반영된 결과다.
해외사업부 역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강력한 반사이익을 누리고 있다. 지난 5월 미국 브릿지바이오파마와 심근병증 치료제 원료 공급 계약(3800만달러·약 560억원)을 체결한 데 이어, 길리어드 사이언스와 대규모 API 공급 계약(1억4000만달러·약 2102억원)을 연달아 따냈다. 지난 1일 1311억원 규모에 이어 15일에는 786억원 규모의 원료의약품(API) 공급 계약을 잇따라 체결하며 9월에만 2000억원이 넘는 수주고를 올렸다. 서방 제약사들의 탈중국 기조 속에서 자회사 유한화학의 CDMO 경쟁력이 연쇄 수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늘어나는 국내외 의약품 수요에 발맞춘 생산 인프라 확충도 속도를 내고 있다. 현재 연간 26억정을 생산하며 공장 가동률 100%를 기록 중인 오창공장의 과부하를 해소하기 위해 약 7억정 생산 능력을 갖춘 오송 경구용 고형제 신공장을 건립 중이다. 원료의약품을 전담하는 유한화학 화성공장 역시 기존 53만2650ℓ 설비에 더해 29만2000ℓ 규모의 대형 HC동을 지난 3월 착공해 2028년 상반기 상업화를 목표로 순항하고 있다.
이중항체·알레르기·MASH 총망라…‘넥스트 렉라자’ 겨눈 파이프라인
유한양행의 다음 스텝은 ‘포스트 렉라자’를 향해 있다. 단일 블록버스터의 성공에 머무르지 않고, 렉라자로 검증된 오픈 이노베이션 엔진을 풀가동해 전 질환군에 걸친 촘촘한 차세대 파이프라인을 가동 중이다.
종양(항암) 부문에서는 에이비엘바이오와 공동 개발 중인 HER2 타깃 이중특이항체 면역항암제 ‘네스프로타미그(YH32367)’이 선두를 달린다. 종양 미세환경에서만 면역세포를 활성화해 기존 면역치료제의 간독성 한계를 극복한 약물로, 현재 글로벌 임상 1/2상을 순항 중이다. EGFR 타깃 이중항체 ‘YH32364’와 제이인츠바이오로부터 도입한 차세대 HER2-TKI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YH42946’ 역시 임상 1/2상 단계에서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여기에 전임상 단계의 다수 고형암 파이프라인(YHC3151, YHC3104, YHC2124 등)이 뒤를 받치고 있다.
면역·염증 부문에서는 지아이이노베이션으로부터 도입한 지속형 IgE 트랩 알레르기 질환 치료제 ‘레시게르셉트(YH35324)’가 최대 기대주로 꼽힌다. 기존 표준 치료제인 졸레어 대비 우수한 체내 IgE 억제 지속 효과를 확인하며 임상 2상 중간 데이터 도출을 앞두고 있어, 글로벌 빅파마 대상 추가 기술수출 논의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대사·심혈관(CVRM) 및 희귀질환 영역의 포트폴리오도 강력하다. 대사이상 지방간염(MASH) 치료제 ‘YH25724’는 FGF21/GLP-1 이중 작용 기전으로 임상 1상을 완료하며 글로벌 파트너링을 모색하고 있다. GC녹십자와 협력하는 희귀유전질환 고셔병 치료제 ‘YH35995’는 뇌혈관장벽(BBB) 투과율을 개선한 경구용 약물로서 임상 1상 단계에 진입했다. 퇴행성디스크 질환 치료제 ‘YH14618(SB-01)’과 위장관운동장애 치료제 ‘YH12852’ 등 특화 질환 파이프라인도 임상 후기 단계를 밟아가고 있다. 다각화된 파이프라인을 바탕으로 ‘글로벌 50대 제약사’로 확실하게 안착하겠다는 목표다.
100년 전 일제 치하에서 오직 국민의 건강과 주권 회복을 위해 종로 덕원빌딩에서 첫발을 뗐던 민족 기업 유한양행. 거둔 열매를 사회와 나누고,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해 K-바이오 생태계를 살찌우며 미래 신약 R&D로 뻗어가는 유한양행의 여정은 이제 한국을 넘어 글로벌 제약바이오의 중심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조욱제 유한양행 대표이사는 “새로운 100년을 맞이해 설립자인 고(故) 유일한 박사님의 숭고한 정신을 ‘Progress(혁신)’와 ‘Integrity(정직)’라는 핵심 가치로 삼아 변함없이 이어갈 것”이라며 “혁신 신약 ‘렉라자’의 세계 무대 진출을 발판 삼아, 인류의 건강에 기여하는 글로벌 혁신 제약사로 도약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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